남편의 바람은 무죄

봄바람 흩날리며언~

by 홍은경

어때? 어울려?”

욕실에서 한참 꿈지럭거리던 남편이 짠하고 나타나더니 그렇게 물었다.

남편을 봤을 때 내 가슴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동안 내내 가슴 졸이며 설마설마했는데, 지금 남편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이 순간 그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왜 그래? 이상해? 다른 색깔로 할 걸 그랬나?”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모습을 비춰보는 남편을 뒤로하고 나는 도망치듯 안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남편은 새벽 운동을 다녀와서 샤워를 하는 줄 알았는데, 머리 염색을 한 것이었다. 그것도 새치를 가리는 검은 염색이 아니라 멋내기용 밤색으로 말이다.


입춘이 지나면서 남편은 수상쩍은 행동을 시작했다. 전에 없이 집안일을 도와준다며 설거지를 하지 않나, 청소기를 돌리지를 않나, 건조기에서 빨래까지 꺼내 개켜주는 것이 여간 께름칙하지 않았다.

남들은 그게 뭐 이상하냐, 남편이 집안일 도와주면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남편이 어떤 사람인데.

부엌에는 뭐 떨어진다며 얼씬도 하지 않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가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부엌을 들락거리며 설거지라니. 게다가 옷차림에도 꽤나 신경을 썼다. 겨울 외투와 파카는 일찌감치 벗어던지고, 아직 그럴 때가 아닌데도 얇디얇은 봄 잠바 하나만 달랑 걸치고 출근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당신 감기 걸려.”

내가 걱정 섞인 잔소리를 늘어놓자 대뜸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마. 나 내일부터 운동할 테니까.”

“하이고, 당신이?”


저녁 먹으면 티브이 앞 소파에 철썩 들러붙어 잠이 올 때까지 돌부처처럼 요지부동도 하지 않는 남편인지라 나는 괜한 흰소리로만 들어 넘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말로 새벽에 운동을 나가는 것이었다.


평소 안 하던 행동을 하니까 처음에는 저 사람이 어디 아픈가? 걱정이 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육감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지. 내 육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봄바람이 처녀 가슴에만 부는 게 아니었다. 틀림없었다. 남편은 바람이 난 것이다!


남편이 바람나면 아내에게 더없이 다정해진다더니 딱 그 말 그대로였다.

나는 차마 대놓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끙끙거리기만 했다.

“어디 가요? 일요일인데?”


한껏 멋을 내며 차려입는 남편을 힐끗 올려다보고 내가 물었다.

“으응, 회사에 볼 일이 있어서. 금방 다녀올게.”

남편은 찡긋, 윙크를 날리고 휘파람을 불면서 현관문을 빠져나갔다.

아니, 저 인간이 이제 저렇게 대놓고 그러시겠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남편을 따라나섰다.


남편은 차를 놔두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 건물 지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나는 부들거리는 두 팔을 미친 듯이 고동치는 가슴에 얹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뻔뻔하기도 하지. 회사 건물 내에서 딴 여자랑 데이트를 하다니. 아주 요절을 내고 말리라! 나는 이를 악물고 커피숍 안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어, 사모님이 웬일이세요?”

일제히 내게로 쏟아지는 남편 부서 직원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나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만든 것은 직원들의 외모였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정 대리,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한 과장, 팔뚝에 문신을 한 이 대리, 크고 작은 피어싱 귀걸이를 한 김 주임까지 거기 모인 직원들은 평소 내가 알던 그렇고 그런 직장인의 흔한 모습이 아니었다.

내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좌중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자 김 주임이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경영 혁신 마인드를 고취시키기 위한 우리 회사 신년 프로그램의 일환이에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나를 바꿔라! 이게 올해 우리 회사 캐치프레이즈거든요. 새로운 나를 창조하고 싶다면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라는 거죠. 외모가 바뀌니까 정말로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사모님도 그 기획에 참가하려고 오신 거예요?”

김 주임의 눈길이 허름한 평상복 차림인 나를 훑었다.

내 얼굴은 벌게졌다.

“하하, 그렇지! 평소 이 사람이 이러고 회사까지 돌아다닐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이것도 새로운 나를 창조하는 운동의 하나라고. 하하하.”

남편이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동안 나는 바보같이 헤벌쭉 웃고만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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