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선물

20여 년 전 풍경

by 홍은경


막 물이 끓기 시작한 냄비에 라면을 넣으려는데 맏며느리가 찾아왔다.

“아니 어머니, 라면 드시려고요? 대체 동선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네. 가만 계세요, 얼른 진지 지어 드릴 테니까.”

호들갑스럽게 시어머니 정 여사를 소파에 앉힌 뒤 맏며느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쌀부터 씻어 안쳤다.


냉장고를 뒤져 식탁에 잔뜩 국거리와 반찬거리를 늘어놓더니 혀를 끌끌 찬다.

“뭐 먹을 만한 게 있어야지. 살림하는 사람이 왜 이 모양이야?”

정 여사는 못 이기는 척 물러나 앉아 국을 끓인다, 반찬을 만든다며 한참 부산을 떨어대는 며느리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 진지 드세요. 마땅한 재료가 없어 대충 있는 걸로 했어요.”

밥상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 한 공기와 된장국, 생선구이, 마른반찬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

“에미야, 너도 같이 먹자.”

“전 먹고 왔어요, 어서 드세요.”

며느리는 생선 살을 발라 정 여사의 밥숟갈에 놓아주었다.


이 아이가 갑자기 왜 이러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정 여사는 내색하지 않고 맛있게 점심을 먹었다.

커피를 마시고 정 여사는 가방을 싸 들고 나와 며느리에게 말했다.

“얘, 에미야 나 니네 집에 가서 살란다. 에민 삼시 세끼 따뜻한 밥 해줄 거지?”

“네?”


맏며느리는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우물쭈물한다.

“아니, 어머니, 저, 그런 게 아니라, 동서한테, 아이참.”

가방을 들고 앞장서서 현관문을 나서는 시어머니를 며느리는 어찌할 수 없었다. 결국 모시고 갈 수밖에.


저녁때 집으로 돌아온 둘째 며느리는 형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 크게 놀랐다. 끼니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아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는 것이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형님 목소리에는 자신을 욕하는 느낌이 실려 있었다. 속상하고 억울하고 분했다. 생전 찾아오지도, 전화도 자주 않던 형님이 하필이면 급한 일 때문에 외출했을 때 찾아왔을까.


둘째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줄곧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형님은 둘째가 어머니를 모시는 조건으로 매달 50만 원씩 주어왔다. 둘째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이유는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결혼 전부터 둘째는 시어른들과 함께 사는 모습을 동경했었다. 자청해서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럼 난 생활비를 조금 보탤게. 형님이 먼저 그런 제의를 해왔기에 경제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터라 둘째네는 잠자코 있었을 뿐이었다. 잘 모시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한다고는 했는데, 미리 얘기도 하지 않고 훌쩍 형님 댁으로 가버린 어머니가 야속하기도 했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에게 그 일을 얘기하자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그동안 당신 고생했어. 오랜만에 우리끼리 어디 놀러 가자.”

기분전환 겸 둘째 내외는 딸아이 은수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갔다.


그날은 마침 어린이날이어서 공원엔 사람들로 넘쳐났다. 입장하면서 받은 풍선을 손목에 매달고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은수를 보니 저절로 마음이 즐거워졌다. 주위는 온통 엄마 아빠 그리고 아이들뿐이었다. 어린이날을 축하하는 온갖 화려하고 멋진 퍼레이드가 여기저기에서 펼쳐졌다.


“나오니까 좋다.”

사람들 때문에 어딜 가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길을 걷다가 어깨를 부딪치기도 했지만 기분만은 상쾌했다.

“어째 은수보다 당신이 더 좋아하는 거 같애.”

남편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빠, 나 저거 탈래.”

은수가 남편의 손목을 잡아끌어 저쪽으로 가는 부녀의 뒷모습이 햇살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다섯 살 은수를 데리고 놀이공원에 온 건 처음이었다. 행복했다.


삼 일 후, 어버이날이 되었다. 설거지도 청소도 뒤로 미뤄둔 채 둘째 며느리는 전화기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형님 댁에 전화를 거는데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딸깍, 신호가 떨어지고 시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죄송해요.”

잔뜩 울상이 되어 겨우 한마디 우물거렸으나 그다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이었다.

“아니다. 오히려 내가 미안하구나. 아무 말도 없이 훌쩍 와버려서 속상했지? 내 일부러 그런 거다.”

정 여사의 말에 둘째 며느리는 어리둥절했다.

“시어미와 함께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게 하려고 부러 그런 거야. 내 다 안다. 큰애가 돈 몇 푼 주고 생색은 또 얼마나 냈는지. 그게 어디 지 주머니에서 나온 거냐? 다 우리 아들이 벌어다 준 거지. 여우같이 일 발린 소리만 해대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니? 다 늦게 시집살이하느라 고생 좀 할 거다.”


“어머니!”

“그동안 니가 나한테 잘해준 거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너한테 잘해주고 싶었어. 나 당분간 여기 있을란다. 그러니까 시어미가 주는 휴가라고 생각해. 아범한텐 내 미리 다 말해 놨다. 너 하고 싶은 것도 하고, 가고 싶은 데도 가고 그래라. 니들까리 어디 놀러도 다니고 말이지, 알았지?”


그 순간 둘째 며느리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고였다. 어버이날에 오히려 어머니로부터 선물을 받다니. 둘째 며느리는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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