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뜯어내던 원규 씨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이런 벌써.”
곧 다가올 결혼기념일 때문이었다. 아니,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으니 결혼기념일이 아니라 살림 합친 날이라고 해야 할까. 그때 꿈 많은 새색시 아내에게 한 약속이 떠오르자 원규 씨는 마음이 짠했다.
“우리 조금만 참자. 나 돈 많이 벌어 당신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어줄게.”
가난한 형편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오던 결혼식이 어느새 20년 세월이 흘러버렸다. 세월이 이렇게 빠를 수가. 아내의 수줍은 옷고름을 푼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서 20년이나 지났다니.
처음 몇 년 동안은 늘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다. 가난한 자신한테 시집와 호강은커녕 식도 올리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사는 데 급급한 생활의 연속이었으니 왜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겠는가. 그러던 것이 점점 시간이 지나 아내의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고 주름살이 하나둘 생겨나면서 그냥 이러구러 사는 거겠지 하며 무덤덤하게 돼버린 자신이 원규 씨는 새삼 한탄스러웠다.
“아빠, 뭔 한숨을 그렇게 땅이 꺼져라 쉬시는 거예요?”
자신보다 훨씬 키가 큰 아들 녀석이 어른스러운 표정으로 원규 씨를 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지? 녀석의 큰 키며, 어른스러운 표정이 새삼 가슴 짠하면서도 대견하게 다가왔다.
“엄마 아빤 결혼사진이 왜 없어?”
어렸을 적 곧잘 그렇게 물어 제 엄마 눈시울을 적시게 했던 저 녀석도 벌써 내년이면 대학생이다. 원규 씨는 결혼 20주년 기념일에 엄마를 놀라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아들에게 물었다.
“왜 없어요?”
아들의 의견은 이랬다. 누가 보냈는지 모르게 이름을 쓰지 말고 결혼식 때 엄마가 받고 싶어 했던 선물을 보내자는 것이다. 괜찮은 생각이었다. 당장에 원규 씨는 선물을 골라왔고, 아들이 우체국으로 가서 부쳤다.
며칠 뒤, 원규 씨는 소포를 받았다. 만년필? 채소 장사를 하는 자신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아무 데도 적혀 있지 않았다. 편지가 들어 있었다.
“결혼 20주년을 축하합니다. 23일 6시까지 공원 분수대 앞 은행 건물 2층으로 나오시오.”
무슨 접선 암호문 같아서 어리둥절했으나 곧 짐작이 갔다. 아내임이 틀림없었다. 그의 총각 적 꿈은 소설가였고, 책상 앞에 앉아 근사한 만년필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만년필은 원규 씨가 결혼 예물로 받고 싶어 했던 선물이었다. 원규 씨는 아내의 선물이 눈물겨웠다.
한편 원규 씨의 아내도 소포를 받았다. 진주 반지였다. 역시 보낸 사람 이름은 없고, 결혼 20주년을 축하한다, 은행 건물 2층으로 나오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진주 반지는 결혼식에서 아내가 받고 싶어 하던 예물이었다.
“영 잊어버리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 양반이 다 기억을 하고 있었구나.”
아내는 뒤늦은 결혼반지를 받고 몹시 기뻐했다.
공원 분수대 앞 은행 건물 2층은 커피숍도 아니고 레스토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식당도 아니었다. 사진관이었다. 부부는 어리둥절했다.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거리다 계단을 막 올라오는 아내를 발견하고 원규 씨는 대뜸 이렇게 물었다.
“아니 왜 이런 곳에서 만나자고 한 거요?”
“어머 당신 벌써 와 있었네? 근데 여기가 어디유? 레스또랑도 아니고, 대체 여긴 뭐 하는 데야? 사진관? 아니 왜 이런 데로 나오라고 했어요? 난 또 근사한 요리나 사주는 줄 알고 잔뜩 기대하고 왔더니만.”
“당신이 여기로 나오라고 했잖아. 이거 보내주믄서.”
“그건 내가 보낸 거 맞긴 하지만, 일루 나오라고 하진 않았어요. 생전 첨 와보는 덴데, 당신이 이 반지 보내믄서 일루 나오라구 한 거면서 딴 소리는.”
서로 가슴 포켓과 손가락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이지만 부부는 이런 엉뚱한 장소에 오게 된 연유를 알지 못해 의아했다. 이때 아들이 나타났다. 부부가 동시에 물었다.
“아니 넌 또 여기 웬일이냐?”
아들이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 어머니 결혼 2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제 선물이에요. 다음엔 신혼여행 보내드릴게요, 헤헤.”
녀석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부부를 사진관 안으로 안내했다. 결혼기념사진촬영은 제 엄마 몰래, 제 아빠 몰래 선물을 보내자고 의견을 낸 아들이 용돈을 털어 준비한 깜짝 선물이었던 것이다. 기특한 녀석, 부부는 아들 녀석이 결혼기념사진을 선물로 줄 줄은 몰랐던 터라 20년이나 지각한 결혼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한 기분이었다. 아들이야말로 부부에게 주어진 최고의 결혼 선물이었다.
“당신 새색시 같아, 여전히 예뻐.”
“당신도 멋져요.”
20년 만에 처음으로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어보는 부부의 눈가에는 어느새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