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에세이 [EP3]
우리는 무언가 마지못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가끔 소거법을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거법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 있다면 굳이 이런 방법을 쓸 필요는 없으니까.
실제로 우리가 진심으로 원해서, 마치 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이거다!'하고 무언가를 선택한 적이 얼마나 있을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봐도 손에 꼽을 정도가 아닌가.
어찌 보면 아무런 걱정 없이, 거리낌 없이 내가 내린 결정에 망설임이 없다는 것은 그야말로 인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한 축복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런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사람이 많을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을 할 때 아무 생각이 없거나 혹은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남들이 하는 것과 같은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소거법까지 쓰는 경우도 별로 없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너무나 많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보고 따라 한다. 친구, 직장 동료, 유튜버가 한다고 '나도 해볼까?'라고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된 과거들처럼 말이다.
평범하게 남들처럼 사는 삶,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렇게 내린 결정에 과연 내가 존재할까.
오히려 소거법을 쓰더라도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에 내 자리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난 밋밋한 세상에 색을 입히는 소거법을 즐겨 쓴다.
중요한 결정이 필요할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깔아 두고 하나씩 조건에 맞춰 지워나가 본다. 그러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순서대로 지워낸 뒤 남은 단 하나의 선택은 내 마음속에 본연의 색을 띠고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직접 고른 단 하나의 선택,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이는 내게 그 무엇보다 무거운 동기를 부여한다. 아무리 작은 선택이라도 내가 직접 선택한 순간, 그 선택은 나를 투영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하나의 긴 선이라고 생각해보자.
일자로 그어진 이 선은 우리가 선택을 내릴 때마다 가지를 치며 이전과 다른 선이 돼버린다. 즉, 우리가 선택을 내리는 순간, 이 선택을 내리기 전과 이 선택을 내린 후의 나는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내린 작은 선택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기존에 우리가 자리해있던 선의 정반대 편에 우리를 서있게 하는 큰 선택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내리는 선택들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 가치와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난 내가 내린 모든 선택들이 소중하다.
직접 내린 선택들이 모여 내 삶의 조각들이 되었기에, 그리고 그 조각들은 아무도 내게서 빼앗아 갈 수 없는 내 존재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고자,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20살 청년이 소중한 2년의 시간을 도전과 실패에 헌납할 정도로 열을 올렸던 창업이 그 조각 중 하나였고,
세상과 물리적으로 단절되어, 직접 경험을 쌓을 수 없는 군대에서 앞으로 도약하기 위해 내실을 다질 수 있는 일을 고민하다가 이젠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독서가 그 조각 중 하나였으며,
무언가를 꾸준히 하고자 시작했던, 그저 그뿐이었을 텐데 이제는 내 삶을 위해 나아가 내 글을 읽어주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멈출 수 없게 된 글쓰기가 바로 그 조각 중 하나였다.
이렇게 하나 둘 조각들이 모였을 때, 모인 조각들을 이어 붙여 그림을 만들어 나갈 때마다, 난 내가 어떤 그림인지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림의 어렴풋한 형태는 알 수 있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본연의 색을 가지지 못한 그림.
아직 미완성인 나의 그림이지만, 그저 내가 보기에 너무나 자랑스러운 내 삶의 조각들 덕분일까, 오히려 그 끝에는 어떤 그림도 가지지 못한 독창적인 그림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다양한 명작들이 존재하고, 그 그림들은 모두 각 작품만의 색과 조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난 오늘도 내가 고른 조각에 나만의 색을 입히려 한다.
오늘을 살아야 한다. 내 손에 들고 있는 공을 여기저기 던져보자. 하고 싶은 일도 해보고, 하기 싫은 일도 해보고, 정말 못할 것 같은 일도 해보자. 그래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문을 두드리고 대화와 협상을 하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는 게 좋다. 결과의 결정권이 내게 없을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그리고 그 결정권이 내게 왔을 때 선택하면 된다.
길이 있어 걷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걸어 내 인생길이 된다. 그렇게 가보자 길이든, 길이 아니든
- 김은주 『생각이 너무 많은 서른 살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