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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슈슈 Apr 02. 2016

귀촌 단행(6)

질문, 하고 계십니까?

우리 동네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만 오갔고,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에는 온통 밭과 나대지뿐. 편의점까지 가려면 15 분여를 걸어나가야 했다. 당연히 노래방과 커피숍 같은 편의 시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비록 논과 밭이 점점이 흩어져 있긴 했지만, 주민 대부분은 공장 근로자였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가 많았다. 이들은 대체로 도로를 따라 지어진 작은 아파트 단지에 모여 살았는데, 내가 살던 곳에는 한국 사람 반, 중국 사람이 반이었다. 명절 연휴가 되면 주변에선 온통 중국어만 들릴 정도로 중국인이 많았다.

그러나 중국인의 인건비가 오르자 동남아 사람들이 그 자리를 빠르게 대체해나갔다. 몇 년 뒤에는 흑인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인건비 형편에 따라 외국인 노동자의 출신지가 달라졌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선 이란, 파키스탄 그리고 몽골 사람을 자주 봤지만, 도시에서 흔히 보던 백인과는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주변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다 보니, 이들과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참 많이 생겼다. 한 번은 장을 보고 집에 가는데 처음 보는 중국인 여자 두 사람이 2층 계단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캐리어를 손에 쥐고 있던 그녀들은 다급한 목소리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 곁을 지나쳐 올라갔지만(난 4층에서 살았다) 그녀들의 목소리는 한동안 집 안까지 들려왔다. 아마도 중국에서 들었던 조건과 현실의 괴리가 컸던 모양이다. 저녁 즈음 산책을 하러 내려갈 때까지도 그녀들은 2층 계단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난간에 걸터앉아 서글피 하늘을 보며 울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하도 처량해 보여 밤새 잊히질 않았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국만리까지 와서 저렇게 슬피 우는 걸까? 찜찜한 마음에 다음날 나는 그녀가 앉아 울던 난간에 작은 종이 모형 하나를 만들어 붙여두었다. 이걸 보고 웃길 바란다는 뜻이었지만, 과연 그녀가 봤을지는 의문이다. 이후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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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외국인 노동자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항상 먼저 일어나 출근하는 사람도 그들이었고, 늦게까지 깨어있는 것도 그들이었다. 그만큼 그들의 노동은 고된 것이었다(물론 그들이 다닌 공장에는 한국 사람도 많았다). 나는 일용직 아르바이트로 자동차 부품을 포장하는 공장에서 얼마간 일한 적이 있는데, 9시에 출근해서 6시 퇴근할 때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앉아 쉴 수가 없을 만큼 일이 고달팠다(정말 깜짝 놀랄 정도의 노동 강도다). 그동안 사무직을 전전하던 나로선 그저 만감이 교차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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