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이후의 삶
집에 와보니 안방에 한가득 책이 쌓여 있었다. 벽면에 놓인 책장만 아홉 개. 나름의 분류 기준에 맞춰 책을 한 권씩 꽂아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서울 좁은 집에선 엄두도 못 낼 일이었으니까.
책이 이렇게까지 늘어난 건 당시 내 유일한 취미 활동이 헌책방 순례였기 때문이다. 근 10여 년간 회사에 다니면서 틈틈이 전국에 있는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책을 사모았다. 이런 내 모습이 가끔 낯설기도 했다. 학창시절, 교과서는커녕 그 재밌다던 영웅문과 은하영웅전설조차 쳐다보지 않던 내가 책이라는 물건에 이렇게까지 깊이 매료될 줄이야… 사람 일이란 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책에 빠져든 건 20대 내내 일만 하며 살았던 환경 탓이 크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또래보다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한편으론 마음의 병을 키운 계기가 됐다. 업계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여러 모임을 전전할 당시, 술자리에 마주 앉은 초면의 한 남자가 나에게 대뜸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이 간단한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히는 내 모습을 보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 많은 뉴스에 관심을 두고 살았으면서, 왜 정작 나 자신에게는 이리도 소홀했단 말인가. 난 지금 잘 살고 있는 건가? 한번 의문이 들기 시작하자, 다시는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그때부터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나 역시 다른 독자들처럼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해안가에 닻을 내리게 됐다.
빌어먹을 대장, 난 당신을 좋아하니까 꼭 말해야겠어요. 당신은 한가지만 빼고는 다 갖췄어요.
광기!
사람이라면 약간의 광기가 필요하죠. 그렇지 않으면... 감히 자신을 묶은 밧줄을 잘라내 자유로워질 엄두조차 내지 못하니까.
예전이라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넘겼을 구절들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그래, 떠날 때가 되었구나. 귀촌 계획은 이때부터 움트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먹고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무려 3년의 세월이 더 소요됐다. 무서웠다. 생각만 하다 늙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