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알기 전에 묻고 싶은 것
현재 PaAp는 열한 명의 구성원이 함께 하고 있다. 생산이사님은 태안에, 경영팀과 기획개발팀은 성수동에, 그 외의 장소에서 유연하게 함께 하는 멤버들, 그리고 지금은 멀리서 서로 응원하는 친구까지. '무엇을 하는 곳인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답은 그 앞머리에 '누가'를 붙여 물을 때 좀 더 선명해진다. PaAp가 생산하는 것들과 바라보는 것을 소개할 때, '이런 생각을 가진, 이러한 활동을 하는, 이러한 이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인터뷰((를 타이틀로 연재하게 될 글은 2020년에 시작하여 2021년 진행 중인, 파아프 사람들의 인터뷰다. 첫 인터뷰부터 오늘의 업로드까지 꽤 긴 시간 차이가 존재하는 만큼, 질문하고 싶은 것도 대답하고 싶은 것도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2020년 이후 새로이 합류한 멤버들의 이야기가 현재 진행형으로 수집되는 가운데, 마스크 없이 대화하던 때의 OB(?)들의 목소리 먼저 실어보려고 한다. 연재의 순서는 인터뷰를 한 순서대로다. 2년에 걸쳐 꾸준히 변화한 인터뷰어의 컨디션 역시 인터뷰의 결을 가르는 요소인 듯하다.
가장 먼저, PaAp의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이너 ㅇㄱㅅ의 인터뷰다.
2020년 3월 26일
한남동에서 만나다.
Part 1. 초성을 통해 떠오른 것들: ㄱㅅ
이름의 초성 'ㄱㅅ'을 가지고 떠오르는 단어들 세 가지에 관해 물어보았다.
‘고소’라는 단어가 바로 떠올랐다. 미울 때는 미워할 뿐 누굴 고소하고 싶었던 적은 없는데 말이다.
물론 고소당한 적도 없다. ‘고소하다’는 맛 표현이기도 하다. 신 커피, 고소한 커피 중에서 늘 고소한 커피를 고른다. 그렇지만 음식은 새콤하고 신 걸 더 좋아한다. 초밥, 냉면, 소바처럼.
‘감시’를 생각하다 보니 연관해서 ‘강시’가 떠올랐다. 중국 전통의 발효 귀신 아닌가. 과발효된 귀신.
아 그러고 보니 ‘귀신’도.
귀신을 좋아한다. 더 정확히는 귀신이 나올 법 한 분위기에서 안전하게 있는 걸 좋아한달까.
음기에 예민한 편이라 빈집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장소를 지나갈 때 간혹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여긴 귀신이 득실득실하겠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하얀 연기 같은 형상, 원귀의 기가 셀수록 형상이 구체화된다고 하더라.
미스터리하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면 늘 설레는 기분을 느낀다.
마지막으로 ‘가사’. 가사 좋은 음악이 좋다. 가사를 잘 쓴 곡을 보면 신기하다. 너무 어렵지 않으면서도 뻔하지 않은 가사가 좋다고 생각한다.
Part 2. 단어를 보고 떠오른 것들: 숫자, 행동
인터뷰어가 두 가지 단어를 가져왔다. 인터뷰이를 생각하면 떠오르거나 평소 묻고 싶었던 단어였을 것이다. 충동적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희한하게도 전혀 중요한 숫자가 아닌데도 몇십 년째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중학교 3학년 10반 7번
보충대 158번
훈련병 번호 132번
군번은 10자… 왠지 모르게 기억이 난다. 누가 외우라고 때린 것도 아닌데.
2월 12일 100일 휴가. 5월 25일 일병 휴가. 7월 17일, 8월 15일, 10월 25일 여기까지 기억난다.
이후에는 기억이 안 난다.
웃긴 건 아무런 의미 없는 숫자들이다.
처음 살았던 집의 번지 276-9…
할머니네 주소 313-10, 수유에서의 사실 때 주소고… 연신내 주소는 기억이 안 난다.
기간이 짧아서 그런가.
아! 50%의 확률로 기억하는 숫자… 최홍만 데뷔전이 3월 9일 아니면 3월 19일이다.
격투기도 안 보고 최홍만 좋아하지도 않는데.
두 번째 단어는 ‘행동’이군.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나의 행동들?
분명히 있는데… 분명히.. 뭘까?
어릴 때… 초등학교 1학년 때 약한 틱이 있었다.
방치하면 틱이 발전한다고 해서 엄마가 병원에 데려 가서 다잡았다.
치료과정이 더 재밌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이 유심히 본 거다.
초등학교 교사 선생님이라 그런지 바로 원인을 찾아냈다.
내가 외동아들인 것도, 우리 엄마 스타일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엄마한테 애를 그만 쳐다보라고 권했다. 덕분에 내가 뭘 해도 의식하게 되니까.
엄마의 관심으로 틱이 생겼고 선생님의 관심으로 틱이 사라졌다.
관심이 발병하게 하고, 관심이 치료를 해준 것이다.
만일 그 선생님이 그런 선생님이 대수롭게 안 했더라면,
엄마는 매일 보니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다.
Part 3. 단어를 이으며 생각난 것들: 소비 + 언제부터/ 목 + 때문에
지금 보니 꽤나 단어 놀음이다. 몇 가지 단어들을 제시하고, 연결하여 문장을 만들도록 했다. 언어인지치료?
Q. 언제부터 소비의 개념이 생겼나?
우리 세대는 취업도 늦고 형제도 많지 않으니까 꽤 늦게까지 세뱃돈을 받는다.
나도 군대 제대 후까지 받았다.
그때부터의 습관인데, 돈을 받으면 ‘감사합니다’하고 돌아서서 돈을 어딘가에 두고 까먹는다.
모든 용돈을 다 버리는 셈이다.
일부러 버리는 게 아니라 돈 개념이 아예 당시까지 없었던 것이랄까.
돈을 모아야 한다거나 돈이 중요한 거라는 인식이 없었다.
엄마의 진단인데, 외아들이니까 …. 각 할머니들의 남아선호 사상도 있고 유독 내게만 용돈을 많이 주셨다.
할머니든 친척이든 삼촌이든…
딱히 쓸데가 없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누구와 나누어 쓸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냥 하나의 종이로 보였다.
강제 절제. 더 중요한 건, 절제당한 돈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회의 매운맛을 보고는 바뀌긴 했는데..
돈이 돈으로 보이기 시작했던 것은 누가 나에게 돈을 안 주기 시작하던 때부터다.
올해 초에도 휴면계좌를 찾았다. 점점 나아지고 있는 것 같다.
Q. 목 때문에 미음 미음을 하게 되었다.
어떤 계기로든 간에 좀비 이야기를 주입시키는 걸 좋아한다.
좀비는 목을 쳐야 죽으니까. 그렇게 설정이 되어있다.
나는 늘 이렇게 설명하는데, 학창 시절에 교실이 있지 않나.
학생들 바글바글하고 쉬는 시간, 수업 시간으로 나뉜다. 그중에서도 체육시간엔 보통 다 나가지 않나.
어느 날 체육을 하다가 아팠나 두고 왔나 여하튼 교실로 들어왔던 적이 있다. 시간상 모두가 있어야 할 시간인데 아무도 없는 느낌이 되게 해방감 같은 걸 느끼게 됐다. 나 혼자 딴 걸 하고 있다는 느낌이려나? 해방감이 맞는 것 같다.
세계가 멸망…이 뒤집어져서 모든 게 다 리셋되고 내가 걱정해야 할 모든 것들이 이거 외엔 다 사라지는 느낌?
이 느낌이 좀비에 빠지게 된 씨앗 같다.
좀비물의 클리세가 몇 가지 있다. 거의 모든 좀비물의 패턴.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의 특징을 보면, 주인공들이 무력감 속에 어떤 발버둥?
이제야 제대로 살기 위해 해 보는 느낌?
완전히 뒤집어진 세상에 혼자 남겨진 해방감을 느낀다.
그런 묘한 초반부 장면을 좋아한다.
일상이 낯설어져 버리는 그 순간이 좋은 것 같다.
대표적으로 장면적으로 잘 표현한 것은 <28일 후>에 첫 장면.
인터뷰이
그래픽 디자이너, 파아프에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맡고 있는 오경섭입니다.
디자인을 언제까지 할지는 모르지만, 못하게 되기 전까지는 저축을 많이 하겠습니다.
오늘 답했던 질문 중에 다음 사람에게도 던지고 싶은 질문은 ‘숫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