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에세이. 실행자의 원리,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하여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26)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를 따라 남동생과 함께 양양 및 속초의 여러 강으로 민물낚시를 다닌 적이 종종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하는 낚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잡는지, 어떤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지, 몇 마리나 잡았는지 등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아버지를 따라다닐 법 했지만 내 동생이나 그렇게 했고 난 정작 다른 것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흐르는 강 주변의 기기묘묘하게 생긴 바위나 조약돌을 찾아다니거나 큰 바위 사이에 괴어 있는 웅덩이 속에서 유영하는 작은 물고기를 잡는 데 열중했다. 그때 보았던 물웅덩이는 무척이나 맑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얼굴과 그 위로 떠다니는 하얀 구름과 푸른 하늘이 비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이러니 물속이 안 보일 리가 없다. 조금이라도 물고기 그림자가 하늘거리기라도 하면 잽싸게 고사리 같은 손을 물속에 넣어 송사리를 한 움큼 잡아챘다. 물론 성공률은 높지 않았다.
어떤 날은 엄청난 비가 쏟아진 뒤 낚시를 간 적이 있었다. 황톳빛을 머금은 물이 곳곳에서 콸콸 쏟아져 내려와 머나먼 바다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날은 암만 봐도 물속이 보이지가 않았다. 물고기는커녕 그 그림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그날은 영 재미가 없었다. 누런 흙탕물 너머의 세상은 실체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저 내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물이 맑으면 물속이 잘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물고기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나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이리 맑은 강물 속 세상을 내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수면의 투명함 덕분이었다. 그 깨끗한 프리즘은 그 내부의 아름답고 정감 가는 모습을 더욱 완연하게 드러낸다.
속도 중요하다. 하지만 속은 여간해선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유리같이 맑게 비치는 강물이 아니라면 그 속을 알 수가 없듯이 사람의 속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마음이 선하거나 다정하더라도 그것이 겉으로 투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그 사람의 선함과 다정함을 알 길이 없다. 사람이 표면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속에 있는 진가가 빛을 발할 수도, 또는 완전히 묻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만 간직하여 혼자 느끼는 믿음만으로는 그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딱 하나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속에 있는 믿음대로 실제 행동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믿음이 강물 속 세상의 아름다움이라면 행동은 그 세상을 맑게 보이게 하는 수면의 투명함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어야만 우리는 강물 속이 참 깨끗하다는 것을, 그리고 믿음이 참 진실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한 설교를 들을 때 내 속의 믿음과 겉의 행동이 모두 진실되게 충족되는지를 스스로 반성해 보았다. 나눔의 삶을 산다고 플로잉을 열심히 실천했던 것 같다. 기도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믿고 실제 기도를 열심히 하던 적도 있었다. 사람을 따스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사랑의 하나라고 생각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었다. 지난 삶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당연히 부족한 부분도 많았겠지만 긍정적인 나 자신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싶다.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던 지난날의 선한 노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 더욱 일상화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가 아닌가 싶다. 윤동주 시인이 자신의 거울을 매일 밤 치열하게 닦았던 것처럼 나 역시 나를 비추는 프리즘을 가열하게 매일 닦아야 한다. 감히 그렇게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