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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Dec 31. 2019

이웃의 죽음

시사. 세월호, 구하라, 그리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비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 밤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는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먼저 양해를 구한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내가 ‘이웃’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의아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이웃’이라고 지칭하고 싶은, 지칭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니 ‘이웃’이라는 단어가 거슬리더라도 참아주길 부탁한다.


최근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한 아버지가 극단적 선택을 하여 이 세상을 떠나갔다. 세월호의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정치적 문제가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에 유가족들의 고통 또한 계속된다, 아니 더욱 후벼 파지고 있다. 선장이나 선원들에게 내려진 처벌은 적절한가, 구조 과정에서 정치적 방만함은 으레 관료적 병폐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인가, 진정한 가해자는 누구인가,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낸 이 참사는 사건 상황의 직접적인 관계자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던 단순 사고인가?(그렇게 이 사건을 쉽게 규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수많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다. 지난한 정치적 해결 과정 속에서 많은 유가족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들 중 64.6%가 직장을 그만두었고 42%가 자살을 생각해 보았으며 실제 4.3%가 자살을 시도해 보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웃인, 나의 20대 최애 아이돌 그룹인 카라의 멤버 구하라 씨 또한 이 세상을 떠났다. 방송 카메라 앞에서 생기발랄한 모습으로 노래하며 화려하게 연예계에서 활동했던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마지막은 외로웠다. 운전할 때 가끔 카라의 노래가 흘러나오면 먹먹해진다. 10년 이상 업데이트하지 않은 음악 목록에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는 카라의 노래(Wanna, 미스터, 프리티걸, 루팡)는 10년 전의 나를 추억하게 한다. 그랬던 그이들 중 한 명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면, 내가 인지하는 세계가 구하라 씨의 사망 이후로 달라졌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제 그녀는 없다.


올해 12월 대구에서는 40대인 부모와 중학생 아들, 초등학생 딸 등 일가족 4명이 이 세상을 떠났다. 정확한 사유는 알 수 없지만 경찰 관계자는 생활고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한 이웃도 무수히 많다. 보도되는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음을 생각해 보면 – 군대에서 더욱 명확히 알게 되었다. 사고 사례 전파는 빙산의 일각임을. - 얼마나 많은 이웃이 고통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일까. 꼭 극단적 선택이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비극적인 죽음도 있다. 올해는 아니지만 2011년에 있었던 시나리오 작가 최 씨의 죽음이 그러했다. 그녀는 월세가 몇 달째 밀린 상태에서 가스도 끊긴 차가운 단칸방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숨진 최 씨를 발견한 같은 다가구 주택에 살던 송 씨의 집 문 앞에는 이런 내용의 쪽지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이들이 개인적 이유로 죽었다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들의 마음이 약해서, 용기가 없어서, 생활력이 부족해서, 성실하지 않아서 등으로 이유로 문제의 원인을 좁혀 버린다면 우리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질까? 그리하여 우리와 전혀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그들이 자신만의 문제를 안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준다면, 우리는 그냥 그렇게 괜찮아지는 걸까?


세월호를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히고 파릇파릇한 새싹을 뭉갠 것은 선장과 선원만의 죄가 아니다. 구하라 씨의 죽음 이면에는 악플러와 여성에 대한 비이성적 편견들이 있다. 대구의 40대 일가족은 다시 회생할 수 있는 사회적 보장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이들의 죽음은 우리 사회 곳곳이 아프고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이 신호를 외면하면 할수록 사회의 병은 깊어져 간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손쓸 수 없는 지경에서야 병원에 가면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이 사회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세월호 참사도, 인격을 말살하는 악플의 문제도, 여성을 대상화시키는 수많은 폭력적인 시선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게 하는 사회 안전망의 부실함도, 이 모든 것이 구조의 문제이고, 그냥 두고 볼수록 온갖 독성을 뿜어내어 더욱 많은 사람의 미래를 앗아갈 것이다. 어제는 내가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내 옆에 있던 지인, 그리고 내일은 나일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이 수많은 죽음을 남의 일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로 여길 수 있으랴. 아무 연관 없는 타자(他者)로 그들을 대한다면 우리는 서로 유리되어 고립된 섬처럼 살게 될 수밖에 없고, 그 끝은 자명하다. 옆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관심 가질 리 없다. 내 일이 되어서야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 눈 돌리면 모두가 외면하는 시선 속에서 절망밖에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감히 그들을 이웃이라 부르겠다. 혹자는 그래서 네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솔직히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이웃의 고통과 죽음에 관심을 갖는 것과 관심을 갖지 않는, 이 기본적인 자세의 차이가 한 개인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라지게 할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이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연대할수록 서로가 유의미하게 연결되면서 각자의 사건에 깊게 공감하려고 애쓰는 건강한 사회로 성장할 것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강의> 중 한 대목을 소개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 사회가 유행처럼 부르짖는 ‘인성’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왜 개인의 태도가 우리 사회를 냉혹한 사회나 따스한 사회로 이끌어갈 수 있는지를 깊게 성찰하게 하는 좋은 글이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인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규정하는 인성이란 한 개인이 맺고 있는 여러 층위의 인간관계에 하여 구성됩니다. 인성은 개인이 자기의 개체 속에 쌓아 놓은 어떤 능력, 즉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 나가는 어떤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논어>에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德性)이 곧 인성입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인간관계라는 관계성의 실체로 보는 것이지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인간입니다. 이 사회성이 바로 인성의 중심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중략)
따라서 인성을 고양시킨다는 것은 먼저 ‘기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자기(自己)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것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자기를 키우는 순서입니다.
(중략)
그리고 그러한 관계론이 확대되면 그것이 곧 사회적인 것이 됩니다. 동양 사상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로 거론되는 화해(和諧)의 사상 역시 그렇습니다. 화(和)는 쌀을 함께 먹는 공동체의 의미이며 해(諧)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민주주의의 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성의 고양이 곧 사회성의 고양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신영복, <강의> p.33~34




우리 모두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조차도 무심히 길거리를 지나가지 않기를. 

길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해피 뉴 이어가 추위 떠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를.

이웃의 죽음을 소중한 슬픔으로 끌어안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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