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앤과 함께 외친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2018년의 마지막 날, 2019년은 분명 Big year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1년이 지난 지금, 예상은 확신이 되었다. 언제나 다사다복(多事多福)했지만 2019년은 특히 그러했다. 누군가 나에게 2019년을 돌이켜 보았을 때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을 세 장면 꼽아보라고 질문한다면 아래와 같이 대답하고 싶다.
1. 셋째 예솔이가 탄생한 순간
집 앞에 있는 강릉 세가온 산부인과에서 셋째 딸인 예솔이가 탄생한 순간, 드디어 자녀 계획이 끝났구나 하는 감격, 막내딸의 탄생에 대한 기쁨과 경이로움, 아내의 수고와 헌신에 대한 감사가 교차했다. 언니, 오빠인 랑랑 남매의 처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았던 예솔이의 시작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심장 쪽에 소리가 깨끗하지 않다고, 그래서 조금 지켜보고 그 현상이 계속되면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을 들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섬뜩했다. 막연하게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기도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다행히 그 소리는 곧 사라졌다. 그 일 이후로는 큰 탈 없이 지금까지 잘 자라줘서 감사할 따름이다.
예상 이상이었던 것은 부모로서 삶의 질이었다. 둘이서 셋이 되는 것이 단순히 산술적인 숫자 하나가 늘어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출산 전에 아내나 나나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가 더 나온 후로는 육아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상상을 초월했다. 이전에는 각자 하나씩 맡아 챙기다가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은 쉬고 나머지 한 사람이 둘을 봐도 그럭저럭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셋이 되니, 아뿔싸, 이건 도저히 쉴 틈이 없다. 아내가 거의 셋째를, 그리고 내가 첫째와 둘째를 주로 전담하다 보니 브레이크 타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한 사람이 아프면 그날 다른 한 사람은 거의 죽음이다. 혼자서 둘을 볼 때와 셋을 볼 때는 확연하게 달랐다. 그나마 맘 편히 쉴 수 있는 때는 애 셋이 다 자는 심야 시간뿐이었다. 그 시간을 활용하여 각자 자유 시간을 갖다 보니 다음 날 피곤한 것은 안 봐도 비디오다. 그렇게 각자의 삶에서 여유도 많이 없어지니 부부가 체감하는 삶의 질도 높지 않았다. 자녀를 셋 이상 가진 친구들이 왜 마음의 준비를 단단하게 하라고 했는지를 새삼 돌아보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행복하다. 내 체력이 방전되어 때로는 소파에, 침대에 널브러져 나도 모르게 잠이 드는 경우도 있지만 행복감은 더욱 커져만 간다. 셋째가 더욱 커서 삼 남매가 같이 어울리기 시작하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어떤 즐거운 추억이 생길까, 이렇게 생각만 해도 몹시 설렌다. 2020년에는 예솔이도 돌을 맞이하고, 지금 말을 잘 못하는 예람이도 대화를 시작할 수 있게 될 텐데, 아빠로서 새롭게 경험하게 될 행복한 날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설레발일까?
2. 세 번째 단편소설 <삼포시대> 탈고한 순간
2017년 2월 19일 상록수 문예지에 <삼각김밥>을 발표하여 소설가로 등단한 후, 연이어 2018년 봄에 <가출 프로젝트>라는 두 번째 소설을 발표하였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탄력 받았을 때 계속 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핑계는 있다. 일단 학교에서는 일이 많고 집에 와서는 어린 자녀들 돌보느라 체력이 부족하여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다……. 뭐, 이런 것이었다. 글을 쓰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니 내가 소설가였는지도 가물가물해지고, 그저 현실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들(학교 업무/ 수업/ 학생 상담/ 육아 등등)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유화웅 교장 선생님의 채찍질이 아니었으면 올해도 셋째 출산, 담임 업무 등의 이유로 유야무야 그냥 넘겼을 것이다.(지면을 빌어 감사드립니다.)
<삼포시대>를 탈고하면서 조금은 소설을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정말 조금이다. 발표하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아직도 갈 길이 멀었구나 생각했다.) 앞서 발표했던 두 작품은 부족함에도 부지런히 쓰는 소설가로서의 초심을 확인시켜 준 등산 안내 표지판이었다면 세 번째 작품은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던 중 정상이 어디이고 어느 정도 남았는지를 알려주는 첫 이정표였다.
2020년에는 단편소설을 네 편 쓰는 것이 목표이다. 이번 방학 때 최소 두 편을 쓰고 여름 방학 때 1편을 쓴 후, 가을-겨울을 거쳐 1편을 쓴다는 계획인데, 과연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완성도가 높든 그렇지 않든, 돈이 되든 되지 않든 그런 것들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겠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한 마음을 잊지 않는 2020년이 되길. 그냥 쓰는 게 좋으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면 행복하니까. 행복하게 살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오지 않을까? 안 따라오면 말고.
3. 예닮글로벌학교 11학년(고2) 예반 담임으로 교실에 처음 들어간 순간
이전 공립학교에서 근무할 때, 담임을 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예닮에 와서 담임을 좀 하고, 교무부장이 된 때부터 약 2년 동안은 담임을 하지 않았다. 그 2년간 좀 외로웠다. 전담해야 할 학급이 없어 학급 학생을 직접 케어해야 하는 부담감은 없었지만 부장으로서 총괄 기획부터 대부분의 실무도 같이 병행하느라 업무 강도가 꽤 셌다. 일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데스크 업무만 하면 할수록 점점 쪼그라드는 느낌이 힘들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학교에서 행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2019년, 비록 셋째는 나오지만 담임을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렇게 되었다.
담임을 맡으면서 실무는 업무 분장 하에 다른 비담임 선생님에게 이관하였다.(그렇다고 실무를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학교의 부장 선생님들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부분에서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여전히 데스크 업무는 많이 한다고.) 그리고 학급 운영해 나가는 1년 동안, 역시 난 담임 체질이라는 것을 몸소 느꼈다. 그런 선택을 한 나를 아낌없이 칭찬해 주고 싶다. 개별 학생의 삶에 실질적으로 동참하면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해나가는 과정은 정말 즐거웠다. 또한 우리 11학년 예반 학생들만큼 사랑스럽고 책임감 넘치는 학생들은 없을 것이다. 그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담임하면서 부장으로서 일하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지면을 빌어 너희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 글을 쓰다가 송구영신 예배로 잠깐 교회에 다녀왔다. 그 사이 자정이 넘어가자 우리 반 친구들의 생일 축하 메시지가 계속 내 핸드폰을 울리는 것이 아닌가. 자야 할 시간에 깨어 있다가 이렇게 빨리 내 생일을 축하해 주는 우리 11학년 예반 친구들, 이 친구들의 담임일 수 있어서 내가 오히려 영광인 한 해였다.
이제 아홉수를 넘어서 우리에게 다가온, 새로운 2020년이 시작되었다. 어떤 일이 닥쳐올지는 모르지만, 모르면 어떠랴. 이제껏 살면서 생각했던 대로 순탄하게 풀린 적은 많지 않았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열심히 부딪히면 될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빨강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한 소녀는 이렇게 말했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빨간 머리 앤> 中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잔뜩 일어나는, 흥미진진한 2020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