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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Mar 01. 2020

오직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5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A.J.크로닌, <천국의 열쇠>

  소년의 적극적인 질문이 그에게 이채롭게 여겨졌을 법했다. 그는 소년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다시 드리퍼에 물줄기를 고르게, 조금씩 부어나갔다. 물줄기는 안에서 바깥으로, 다시 바깥에서 안쪽으로 소용돌이처럼 원을 그렸다. 커피 가루가 탐스러운 초코 머핀처럼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서버에 커피가 어느 정도 추출되자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드리퍼를 치웠다. 커피를 내리는 그의 모습은 문학 작품처럼 우아하고 기품 있었으며, 동작 하나하나는 수학 법칙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했다.

  소년이 멍하게 보고 있는 사이, 커피 한 잔을 들고 그는 다시 소년 앞에 앉았다.

  “그럼 크로닌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까? 아치볼드 조지프 크로닌. 1896년에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지. 어린 시절 톨스토이와 비슷한 점이 있는데, 뭘까?”

  그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아까 들었던 톨스토이의 이력을 더듬었다.

  “이분도 혹시……,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다거나……?”

  “빙고!”

  어물거리는 소년의 대답에 그는 반색했다.

  “너, 보기보다는 뇌가 잘 작동하는데? 우동 사리는 아니었군.”

  이 아저씨는 나를 격려하다가도 놀리는 것 같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고 소년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안타깝게도 사고로 아버지, 어머니 다 돌아가시고, 외 할아버지가 맡아 키웠지. 아버지는 가톨릭 신자이고 어머니는 개신교 신자였던 것이 은연중에 인도주의적인 작품을 쓰게 되는 이유 중 하나이지는 않았을까 싶다. 외 할아버지가 상당히 양육을 잘했던 것 같기도 하고. 소설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사회에서의 시작은 의사였지. 제1차 세계 대전에는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전쟁 후에는 인도행 선박의 촉탁의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런던에서 병원을 개업해 활동했지만……, 결국 병원을 접었어.”

  “왜요? 아깝다.”

  “소설 쓰려고.”

  “헉, 소설가가 되려고 의사를 포기했다고요?”

  소년은 크로닌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의대에 진학할 수 있다고 알리는 순간 아마 대한민국의 수많은 고등학생이 제일 먼저 악마 앞에 서기 위해 몰려들 것이다. 그런 의사를 고작 소설가 때문에 걷어찼다고?

  “아저씨, 톨스토이도 그렇고, 크로닌도 그렇고, 다 미친 거 아니에요? 원래 소설 쓰려면 그 정도로 미쳐야 하는 건가요?”

  그는 소년의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글쎄, 그렇게 단정 짓기 전에 몇 가지 짚어 보자. 일단 너는 한국 사람, 크로닌은 영연방 사람. 의사에 대한 인식이 나라마다 다를 수 있겠지. 둘째, 너는 2020년을 살고 있고, 크로니는 1900년대 초반을 살았지. 시간의 흐름은 가치나 인식을 강화하거나 약화할 수 있어. 셋째, 너와 크로닌은 애초에 다른 사람. 서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도 다르겠지. 그러니 다른 것은 그저 다른 것이야. 이해 못 해도 할 수 없는 법이지. 서로 인정해 줄 뿐.”

  “아……, 그러네요.”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크로닌이 의사가 아닌 소설가로 이름을 남긴 것은 소설가로서의 삶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의사와 관련한 선택과 행동보다는 소설가로서의 그것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겠지. 슈바이처 들어봤지? 그는 의사 이전 20세기 최고의 개신교 신학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가 개신교 목회자보다도 의사로서 이름을 남기고 우리에게 그렇게 더 많이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일반적인 목회자처럼 복음을 전파하기보다는 의료 봉사를 통해 생명 외경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냈기 때문은 아닐까?”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니 가치와 생활이 일치하면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는 법이다. 크로닌도 종교적이면서도 인류 보편적 관점에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끊임없이 궁구했지. 그것을 소설 작품으로서 표현하고 싶어 했고. 그 과정에서 태어난 <천국의 열쇠>는 크로닌이 지향하는 사랑이 잘 표현된 작품, 톨스토이만큼 유명한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그는 자신만의 답을 그 작품을 통해 내놓음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했지. 소년, 너는 네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너의 삶에서 어떤 답을 내놓고 있지? 그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 스스로 어떤 삶을 진정 원하는지 알게 될 거다.”

  소년은 그의 말을 거울삼아 자신을 비춰 보았다. 아직 되고 싶은 것이 없어 공부에도 큰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것을 폼 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소연이는? 소연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설레면서도 아려온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내내 소연이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년은 자기 삶이 그저 가을의 높고 푸른 하늘 안에서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 같았다. 좋게 말하면 순리대로 사는 삶, 나쁘게 말하면 되는 대로 사는 삶. 일견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억지로 소연이를 끼워 넣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철썩, 소년은 자신의 뺨을 쳤다. 아니다. 소연이에 대한 내 마음은 그 정도가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소연이를 좋아한다. 사랑까지는 모르겠지만 소연이를 삿된 목적으로 내 생활에 개입시킨 것은 절대 아니다. 소년은 속으로 그렇게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소년의 갈팡질팡하는 속내를 알 듯 말 듯 그저 희미하게 웃고만 있었다.



4. 세묜, 치셤, 그리고 사랑이란


  “이제 30분 정도 남았네. 사람 얘기는 얼추 다 했으니, 이제 그들이 쓴 작품 얘기를 마저 하고 끝내자고.”

  그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하듯 짐짓 쾌활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급격히 피곤해진 소년은 퀭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30분, 30분만 지나면 끝난다. 조금만 참자. 소년은 속으로 자신을 격려하면서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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