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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Feb 23. 2020

오직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4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A.J.크로닌, <천국의 열쇠>

  “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터키어가 어려웠나?”

  소년의 대답은 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연민은 사랑의 한 모습이지. 톨스토이는 농민을 연민했어. 귀족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불우해 보이는 그들의 삶을 연민했었지. 농민을 사랑했고 그들을 어떻게든 돕고 싶어서 법 공부를 시작했는데, 뜻은 가상했지만 법을 공부하는 것이 본인에게는 잘 맞지 않았는지 학습 태도 불량으로 유급되다가 결국에는 자퇴했고, 일반적으로 귀족들이 문관이 되거나 군인이 되는 것에 비해 톨스토이는 바로 자기 영지로 돌아가 농민들을 돌보려고 노력했단 말이야, 그런데…….”

  소년은 이어지는 그의 말에 집중했다.

  “실패도 이런 실패가 없지. 대실패야. 나름 교육과 의료 등 농민들의 복지를 위해 노력했지만 농민들의 차가운 시선을 극복하지 못했단 말씀. 그럴 만도 하지. 그 당시 러시아 내 민중들의 삶은 처참했거든. 귀족들이 나라의 부를 거의 독점하니 대다수의 민중은 가난할 수밖에 없지. 민중들이 힘이 없다고 눈이 없는 것은 아니었어. 귀족들의 교만하고 타락한 모습을 똑똑히 보고 있었고 그들이 자신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분노가 쌓이고 있는 상황이었지. 그들의 영혼을 위로해줄 러시아 정교회는 귀족들과 결탁하여 민중을 외면하고. 이런 상황이니 톨스토이가 농민을 위해서 시도하는 모든 것들도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으니 도저히 먹혀들어가지가 않았던 거야.”

  그는 창밖에 있을 높게 솟은 회색빛의 건물을 떠올렸다.

  “재밌지 않아?”

  “음……, 뭐가요?”

  자신감은 부족해도 소년의 대답은 바로 튀어나왔다. 자신이 톨스토이와 비슷하다는 그의 말에 소년은 꽤 감명받은 눈치였다. 그래서 그런지 농민을 그렇게 사랑한 톨스토이의 실패가 마치 자신의 실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야기가 시작했을 때와는 다르게 자신이 그의 이야기에 조금씩 몰입하고 있음을 소년은 알지 못했다.

  “이 대한민국만 봐도, 너도 이 땅에서 태어나 보고 들어온 것이 있을 테니 더 잘 알겠지만 말이야,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하고, 그렇게 점차 탐욕스러워지지. 없는 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더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면 선량한 성품도 돌변하게 되고……. 너, 염상섭의 <두 파산> 정도는 읽었지?”

  소년은 자기가 아는 이름이 나와 모처럼 반가워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그건 한국 단편 소설이니까 공부를 좀 했어요. 여자 둘이 나와서 하나가 엄청 돈 가지고 거드름 피우고 한 여자는 자존심 상해하고. 맞죠?”

  그는 그저 조소했다.

  “그 작품도 좀 괜찮지. 등장하는 인간 군상이나 갈등 구도는 뻔한 편이지만, 인간이 무너지는 미묘한 틈을 포착하는 시선은 제법 날카롭거든. 인간의 한 단면을 여실히 관찰해낸 것만으로도 그 작품은 감상할 가치가 있어. 그러고 보면 인간들은 말이지……, 연약해서 그런지 욕심이 많아.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키우고 기르기보다는 밖에 있는 것을 자기 안에 채워서 강해진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려고 하지. 그러다 보면 순리를 거스르는 것까지도 욕심 때문에 거부하지를 못해. 그렇게, 천천히 탁해져 가는 것도 맛있긴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야.”

  소년은 자기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아저씨, 탁해져 가는 게 맛있다고요? 그건 도대체 무슨 얘기예요?”

  그는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탁해져서 멋있다고 했어. 네가 잘못 들은 거야. 그나저나 톨스토이가 살던 1890년대 러시아의 사회상이나 네가 살고 있는 2020년대 대한민국의 사회상이나 거의 비슷하지 않아? 요새 그런 말이 유행이라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소년은 홀린 듯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 걸렸다. 소년이 생각해도 그런 것 같다. 당장 학교만 봐도 입시 교육이 문제라고 외친 것이 벌써 몇십 년도 더 된 일이다. 그 당시에도 문제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공부를 많이 해서 지금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도 이 문제를 알고 있었을 텐데 바뀐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역시 그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다. 소년의 깊어지는 생각과 별개로 그의 말은 이어졌다.

  “톨스토이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잠시 방황했지. 귀족이라 사교계에서 방탕하게 보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축내다가 맏형 니콜라이가 복무하던 캅카스 전선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거든.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캅카스 전선 지역에서 살던 카자크들은 러시아 사람들과는 좀 달랐단 말이야. 톨스토이는 농노 제도도 없는 그들의 언어와 문화 및 풍속에 깊은 감명을 받아쓴 글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작가로서도 살게 되었지. 그 후 그에게 문인으로서 명성을 안겨 준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종군 경험, 귀족으로서 상류층의 삶을 관찰하면서 느낀 것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삶과 죽음, 도덕과 신념의 문제에 대한 사색을 유감없이 작품에다 쏟아부었다.”

  그는 말을 잠시 멈춘 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톨스토이는 지독한 낭만주의자였지. 작가로서 그렇게 성공을 거두었는데도 삶의 초점을 전혀 잃지 않았어. 농민에 대한 연민, 민중에 대한 애정은 그가 부해질수록 함께 강렬해져 스스로 바른 삶을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했지. 프로이트 그 양반이 봤다면 슈퍼 에고에 인생이 잡아먹힌 사람이라고 평했을 거야. 그래도 난 톨스토이, 그 양반의 지독함이 아주 사랑스러워. 순도 높은 그 사랑의 감정이 자신을 불태우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단 말이야. 러시아 정교회에 대항해 자신만의 종교 이념인 톨스토이주의를 주창하다가 파문당하고, 사유재산을 갖고 있는 것을 죄라고 여겨 아내랑 반목하다가 가출하고.(저작권과 판매료를 사회에 환원하고자 했거든.) 그러다 결국 길거리에서 급사했지. 러시아의 대문호에는 어울리지 않는 죽음이었지만 한 평생 농민을 사랑하고, 더욱이 자신의 신념을 사랑한 로맨티시스트로서의 최후로는 더할 나위가 없었단 말이야. 아주, 아주, 강렬했어. 후훗.”

  그는 쿡쿡 웃더니 소년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한 소녀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소년. 톨스토이가 농민을 너무 사랑해서, 농민처럼 되어 자신의 신념대로 살고 싶어 해서 수많은 것을 포기했던 것을 어떻게 생각해?”

  소년은 톨스토이처럼 사는 것은 절대 무리라고 생각했다.

  “어, 아저씨. 솔직히 톨스토이는 미친 사람 아니에요? 음, 그 정도로 스케일 크게 미쳐있으니 위인이고 역사에 길이 남는 사람이겠죠. 저랑 공통점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건, 뭐, 비교조차 되지 않잖아요, 제 삶은 톨스토이에 비하면 별거 없다고요…….”

  “그렇다고 크게 다르지도 않아.”

  소년의 어리숙하고 자신 없는 말을 그는 중간에 잘라 버렸다.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소중하지. 삶의 가치에 경중을 재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일이야. 너희 인간들은 누구의 삶은 위대하고 누구의 삶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던데……, 그렇게 판단하는 게 정말 합리적인가? 가치를 정하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이지? 너의 친구? 아니면 부모? 선생? 세상 속 많은 사람들?”

  그는 담담하면서도 강렬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명심해. 자기 삶의 가치는 다른 사람의 평가와는 아무 상관없어. 그 자체로도 이미 충분히 고귀한 것인데, 이 단순한 진리를 인간들은 눈에 뭐가 씌었는지, 아니면 단체로 뭐에 지배당하고 있듯이 망각하고 있단 말이지. 네가 소연이를 사랑하는 것은 그 누구의 삶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귀한 일이지……. 흠, 커피 한 잔 더 마실래?”

  소년은 문득 물이 마시고 싶었다. 꽉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뺀 채,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갔는지 알 수가 없어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이제 약 20분 정도 지나 있었다. 그 사이 그는 귀여운 여우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물컵에 물을 담아 소년에게 건네고, 자신이 마실 커피를 내렸다. 손수 커피콩을 갈아 만들면서 풍기는 그윽한 향이 소년의 코를 벌름거리게 했다. 그가 했던 얘기가 메아리처럼 가슴속에 울렸다. 뭐야, 이 아저씨, 설마 나를 위로해 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자 그를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따뜻해졌다.

  자연스럽게 커피를 내리는 그에게 소년은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저씨, 톨스토이는 다 끝났어요? 크로닌은요?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 다음 편에 계속





한창 유행하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의 이미지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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