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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Feb 16. 2020

오직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3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A.J크로닌 <천국의 열쇠>

  “너 소연이 좋아하지?”

  소년은 소연이 얘기에 언제 긴장했냐는 듯이 쑥스러워하며 헤실헤실 웃는다. 머리를 긁적거리는 모습이 순박하다.

  “네, 뭐……, 혼자 짝사랑하는 거죠…….”

  “그럼 네가 요새 가장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대상도 소연이겠네……. 소연이를 사랑하니?”

  “사랑……,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연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어요.”

  소년의 답변에서 제법 열의가 느껴졌다. 

  “그렇게 사랑하는데 왜 여태 말 한 번 못 붙여 봤냐?”

  “으,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 같은 게 아무 맥락 없이 말 붙였다가는 상대도 안 해줄 텐데요……. 괜히 이상한 애로 소연이에게 찍히는 것보다는……, 그냥 평범하게 남는 게 낫죠.”

  그렇게 말하는 소년은 스스로에게 자신 없어 보였다. 고개를 푹 수그린 소년을 그는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하긴 내가 봐도 그래. 네가 잘 생긴 것도 아니고, 행동거지를 보니까 똘똘하지는 않고, 공부도 그럭저럭? 친구들하고 한 내기에 휘둘리는 것을 보니 성격도 소심한 것 같고. 나 같아도 너 같은 애가 아무 이유 없이 쭈뼛쭈뼛 접근하면 얘, 뭐야 이런 식으로 반응할 것 같은데? 아니면 응, 안녕, 응, 아니, 지금은 좀 바빠서, 이렇게 의례적으로 대하면서 무시하거나.”

  그의 신랄한 지적에 소년의 고개가 바닥으로 더 쳐졌다. 쿡쿡, 그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이 제대로 된 손님을 위해 가까운 책장에 가서 책 두 권을 골라왔다. 그는 앉아있는 소년 앞으로 한 권을 쓱 밀면서 물었다.

  “너, 톨스토이라고 들어봤어?”



3. 톨스토이와 크로닌, 그리고 소년


  소년은 속으로 소연이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톨스토이를 묻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소연이와 톨스토이가 도대체 무슨 관계인지, 왜 톨스토이가 지금 튀어나오는 것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어서 소년은 짐짓 화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는데 그는 비웃는 표정 하나 없이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엄숙함에 눌린 소년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그러자 그는 다른 책을 다시 소년에게 들이밀었다. ‘천국의 열쇠’라고 표지에 적혀 있었다. 

  “크로닌은?”

  “아뇨, 그 사람은……. 지금 처음 들어봤어요.”

  김이 빠진 소년의 대답에 그는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너 표정에 다 쓰여 있다. 도대체 이런 얘기를 지금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일단 한 시간만 참고 들어. 어차피 그런 조건이었으니까. 대신 중간에 듣다가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너도 해. 알았지?”

  그의 말에 소년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만에 하나 태도가 불량하다고 사진을 안 찍어주면 어떻게 할까 싶다. 어떻게든 내기에 이겨야 한다는 일념으로 소년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너랑 톨스토이가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게 뭔 줄 알아?”

  거의 백여 년 전의 사람이 자기랑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게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억울했다. 톨스토이는 시험 문제에도 나오지 않는데 자신이 그것을 꼼꼼하게 공부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의 약한 점을 아까부터 그가 긁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대답하는 말이 고울 리 없다.

  “몰라요.”

  소년의 입이 댓 발 나왔지만 그는 역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사랑이지.”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양팔을 치켜들고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무대에서 과장되게 연기하는 연극배우처럼 그는 홀로 꿈길을 걷고 있는 듯이 황홀해하며 말을 이어갔다.

  “한 번 사랑에 빠지면, 특히 손에 닿을 듯하면서도 닿지 않는, 그런 존재를 온몸으로 사랑하게 되면, 인생 전체가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 법이지. 그때의 격렬한 감정, 널뛰는 마음, 눈부심과 비참함의 이중주, 고뇌와 번민 속에서 허우적대는 자아……, 정말이지…….”

  그가 소년을 슬그머니 보고 살짝 웃는다.

  “아주 매력적이지…….”

  방금 입맛을 다신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소년은 그의 강렬한 웅변에 잠깐 혼미해진 정신을 다잡았다.

  “그래, 너도 톨스토이만큼 매력적이라고.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소파에 앉아 차분한 모습으로 커피를 홀짝였다.

  “아저씨, 저는 소연이를 사, 사랑하기는 한데, 그러면……, 톨스토이는 무엇을 사랑했나요?” 

  “인간.”

  “네? 인간요?”

  그는 턱을 매만졌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했을지도 모르지. 자신의 신념을.” 

  그는 마시던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본격적으로 얘기를 해보실까나……. 먼저 톨스토이의 생애. 이력이 남달라. 타고난 대로 땅을 가진 지주로서 편안하게 살 수 있었는데,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거든. 러시아 툴라 근방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그가 2살 때 사망, 아버지는 9살에 사망했지. 어처구니없게도 아버지 사후 돌봐주던 큰 고모도 14세 때 사망해서 작은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지. 기구하게도 자신의 보호자들을 어린 시절에 연이어서 잃어버렸어. 유년의 경험이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성향이나 가치관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거든?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인데 충분히 톨스토이에게도 적용해볼 만하지. 사랑을 주던 대상이 갑자기 사라지는 상실감과 일관된 사랑을 받지 못한 불안정함은 그가 평생 사랑에 주목하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무의식적인 원천이 아닐까. 그래도 다행히 그가 세속적 의미로 타락하지 않은 것은 –응? 그런 거 있잖아, 사기, 도둑질, 강간, 살해 같은 것- 그를 끊임없이 누군가 돌봐주었기 때문이겠지. 줄지어서 보호자들이 사망해도 누군가 나타나서 그의 후견인이 되어주고 또 형제들과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한 경험은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랑에도 분명 영향을 끼쳤을 거야. 아, 너 지금 몇 살이냐?”

  “아, 저는, 네, 음, 아저씨, 뭐라고 하셨어요?”

  “몇 살이냐고.”

  소년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 열여덟이에요. 고2.”

  “그렇구나. 톨스토이는 너보다 한 살 어릴 때 대학에 들어갔어. 카잔 대학에.”

  소년은 듣고 매우 부러운 눈치였다.

  “와, 정말 유명한 사람은 뭔가 다르네요. 17살에 대학이라니. 머리가 엄청 좋았나 보네요.”

  “글쎄, 머리가 좋은 지는 잘 모르겠네. 보통 러시아에서는 17~18세면 대학 갈 나이거든. 그런데 대학을 순탄하게 다니지는 못했어. 처음에는 외교관이 되려고 터키어를 배우는 동양어학과에 입학했다가 나중에 법학부로 전과했지. 왜 중간에 노선을 변경했을까?”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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