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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묘 Feb 08. 2020

오직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2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A.J.크로닌, <천국의 열쇠>

 “아저씨, 죄송하지만……, 저랑 사진 하나만 찍어주실 수 있어요?”

  그는 소년에게 은근히 기대한 바가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맥이 탁 풀렸다. 이전에도 찾아와 자신을 파워블로거나 인스타 인플루언서라고 별 괴상망측한 이름으로 소개했던 녀석들도 이런 부탁을 했었다. 자신이 주인장과 사진을 찍고 홍보해 줄 테니 책장에 있는 책 몇 권을 기념으로 달라고 했었지. 그래서 최근에 배운 말로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꺼지라고.

  이 소년에게도 똑같은 대답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 슬펐다. 하지만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다시 한번 물었다.

  “너 사진 찍은 후 원하는 거 있어? 사진 찍어서 책방 홍보해주면 내가 뭘 해줘야 하나?”

  오늘 대화 중 가장 길었던 그의 가라앉은 말에 소년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아저씨, 원하는 것 같은 거 없어요. 저, 저는 그냥 평범한 고, 고등학생이라고요! 가게 홍보 같은 것은 할 줄도 몰라요!”

  “근데 사진 왜?”

  그는 의아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소년은 한참 망설이다가 불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친구들이랑 내기했거든요. 아저씨랑 사진 찍어오면 소연이 한 번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해서…….”

  소연이?

  무미건조한 그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소년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걔, 뭐야.”

  소년은 태도가 약간 달라진 그를 보고 희망을 가졌다.

  “정말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정말 부족한 데가 없는 우리 학교 여자애예요.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어서 얼굴만 아는 앤 데요, 걔는 아마 저를 모를 거예요. 저랑은 비교도 안 되는 애지요…….”

  소년의 말소리가 점차 줄어들었고 이내 소년은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닫아 버렸다.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다시 푹 숙인 소년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또래 여자아이를 말할 때에는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소년이 자기를 말할 때에는 위축된 표정으로 순식간에 변화하는 것이 사뭇 흥미로웠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손님이 책방을 방문한 것 같아 그는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소년의 뒤통수를 바라보면서 무표정했던 그의 눈매가 점점 휘어지고 있었다.

  “왜 안 되겠어?”

  소년은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고개를 순식간에 쳐들었다. 동그란 눈으로 그에게 진심이냐고 물어보고 싶은 듯했다.

  “사진 같이 찍는 게 뭐 어렵다고. 찍어 줄게.”

  그의 말에 소년은 “아저씨, 고마워요!”하며 반색한 채 스마트폰을 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앉아.”하는 그의 말에 다시 그대로 자리에 주저 않았다.

  소년은 그가 웃고 있는 표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웹툰에서 봤던 여우처럼 눈매와 입꼬리가 호선을 그린 채 잔뜩 올라가 있었다. 웃는 사람은 매우 기분 좋아 보이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이런, 내가 오랜만에 남이랑 사진 찍는다고 생각하니 좋아서 표정관리가 안 되었나 보군.”

  그는 잠깐 뒤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괴이한 미소는 온 데 간 데 없이 다시 무표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조건이 있다.”

  소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불안했지만 사진 하나만 찍으면 소연이와 개인적으로 안면을 익힐 수 있다는 생각에 없던 용기도 쥐어짜 냈다. 책장에 있는 십자가와 목탁을 보면서 하나님, 부처님, 제발 아무 일 없게 해 주세요, 사진만 잘 찍고 나오게 해 주세요, 제발, 제발, 이렇게 빕니다 하며 속으로 기도했다.

  그는 소년의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어갔다.

  “나한테 한 시간만 다오. 한 시간 동안 내 얘기를 너는 듣기만 하면 된다. 내 얘기가 끝나면 그다음에는 사진 한 장이든, 백 장이든 찍게 해 주마.”

  소년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조건에 마음이 놓였다.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된다니 일단 다행이었다. 얼마 전에 부모님한테 들었던 사이비 종교가 떠올랐지만 자신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나만 정신 차리면 된다. 한 시간만 참으면 내기에서 이길 수 있어. 소연이와 전혀 상관없는 사이에서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될 수 있다고.’

  조금 주저하다가 결국 소년은 그의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언제 시작해요?”

  그는 소년이 자신의 조건을 승낙한 것이 몹시 만족스러웠다. 책방을 열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손님과 거래를 하게 되었으니 그가 마음속으로 무척 기뻐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지금 당장 시작하지. 시간 괜찮아?”

  소년은 때마침 별다른 일은 없었다. 좀 있으면 점심 먹고 학원을 가야 하지만 점심은 학원 근처 편의점에서 대충 때우면 된다. 그렇게 하면 학원 가기까지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기에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반응에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책방 출입문의 전면 쇼윈도에 달려 있던 검은 암막 커튼을 쳤다. 삽시간에 책방 안은 어두워졌다. 천장의 주백색 등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소년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아, 아저씨, 갑자기 커튼은 왜 쳐요? 혹시……?”

  이상한 데에 생각이 미친 소년은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며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그런 소년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나도 남자한테는 관심 없어. 오버하지 말고 편안하게 앉아. 이야기하는 데 집중하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그는 커튼을 다 치고 다시 원래 앉았던 자리로 돌아왔다. 

  “자, 지금부터 한 시간이야.”

  소년은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 긴장되었다. 절대 세뇌당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자신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가 시작한 대화의 첫 화제는 소년의 예상을 벗어났다.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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