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묘 Oct 08. 2019

아빠, 잘 자? 아빠 잘 자!

육아 에세이. 아이에게 위로받는 아빠, 그 순간의 따스함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집이 아닌 곳에서, 서로의 거리를 좁히기 어려운, 마음의 작은 모양마저 다를 수밖에 없는 타인(他人)과의 시간. 형체 없는 압력이,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 끊임없이 몸에 힘을 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나의 내면을 말살시킬 것 같은, 그 압력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시간. 그런 시간이 하루 종일 이어진다면 누구나 지칠 수밖에 없는, 그런 날이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능력과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다 보니 그동안의 부담감이 그날 임계점에 도달하였던 것일까. 학교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관계의 홍수에 휩쓸려 나보다 타인에게 에너지를 더욱 쏟아부어서, 그래서 정작 나는 기진맥진하였던 것일까. 구체적인 원인을 규명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며 글을 쓰는 지금, 그저 막연하게 '아, 그날 무척 힘들었지.' 하는 인상만 남아 있는, 그런 날이 있었다.


퇴근하고 일부러 자유로운 바람이라도 느끼고 싶어 자동차 창문을 다 내리고 집으로 돌아간 그날. 밤늦은 시간, 이미 하루를 마감한 수많은 차들이 주차할 곳에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내 차는 방황하였다. 결국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가로등 밑의 어딘가에 힘겹게 주차를 한 후 아파트 내부로 들어갔다. 오래된 아파트, 복도 곳곳은 낡아버린 페인트의 침묵이, 엘리베이터 없는 계단은 먼지가 소복이 쌓여 적막하고 황량하다. 다행히 집은 1층이다. 몇 개의 계단만이 남았다. 낮은 계단 하나하나가 나를 맞아주었다. 한 걸음, 두 걸음, 중력을 거스르며 올라갔다. 꾹꾹 디디는 곳을 힘을 줘서 떨쳐냈다. 마치 무언가를 떨쳐내고 싶은 것처럼. 덕분에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100층 같은 1층 계단을 올라왔더니 현관문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삐삐삑삐삑삐, 기계적으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띠로롱,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문을 열었다.


"아빠~."

"빠, 빠."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이 나를 향해 거세게 달려들었다. 둘이 합쳐도 내 몸무게의 반도 안 되는데 그날따라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번쩍 안아주지 못했다. 그저 무기력하게 오른 다리, 왼 다리, 사이좋게 하나씩 붙들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날은 침대로 직행이다. 밤 10시, 피곤한 몸으로는 무언가를 더 할 수 없는 상태. 부엌에 있던 아내와 짧은 눈인사를 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셋째를 임신하고 있는 아내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이기적인 감정이 나를 붙들었다. 원래는 아이들과 조금 놀아준 뒤, 한 명 한 명 양치질, 세수, 옷 갈아입히기 등의 재우기 루틴을 실시했어야 하는데 그날 나의 베이비 시터 프로그램은 캐시 과부하로 도저히 실행될 수 없었다.


아내, 미안해.


조용히 마음으로 뇌까리고 침대에 가서 누웠다. 당장 천국에 가도 여한이 없다는 심정으로 그저 눈을 감았다. 아이들이 침대 주변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들에겐 아빠랑 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첫째는 계속 상의를 들추고 배를 들이대면서 간지럽혀달라고 애교를 부린다. 둘째는 공을 가지고 와서 같이 공놀이 하자고 "콩, 콩!" 계속 외친다. 미안함과 짜증의 마음이 동시에 솟구쳐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데, 다행히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다.


아내, 정말 고맙고 미안해.....


내가 생각해도 이 날은 정말 이기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노곤함, 그 피로감을 먼저 달래려고 했다. 침대에 계속 누워서 눈을 감고 이 세계로부터, 그 중압감과 무기력감, 모든 부담감으로부터 나를 분리하려고 노력했다. 그저 누워 있으니 몸은 편해졌다. 하지만 위로받지 못한 나의 마음은 내면의 압력으로 침대의 매트리스를 뚫고 들어갈 정도로 계속 짓눌렸다. 큰 일이다. 이러다 밤새는 거 아냐. 내일 정말 죽겠구나. 엉뚱한 생각들이 자꾸 나를 덮쳤다. 분리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관계되어 있는 세상의 수많은 일들이 더 확산되고 연결되었다.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잠을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오면 기존의 스트레스와는 다른, 별개의 스트레스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 밖에서는 한창 내가 하지 못했던 재우기 루틴을 아내가 진행하는 소리가 들렸다. 첫째가 "나 양치 아빠랑 할 거야." 하며 투정 부리는 것을 아내가 달래기도 하다가 결국 호랑이 같은 큰 소리로 혼냈다.


내일은 어떻게 견뎌내지, 견뎌낼 수 있을까, 이렇게 며칠을 보내면 정말 말라비틀어지겠구먼, 다 때려치우고 싶다, 아니, 그럼 우리 가족 누가 먹여 살려, 물론 하나님이 먹여 살리시겠지만, 그래도 내가 일을 해야 나를 통로로 사용하시지, 그런데 힘든 건 정말 힘들다, 우리 가족 빼고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고, 세상에 혼자만 있는 느낌이 과장은 아니잖아, 아니야, 이런 생각하지 말고 내일은 좀 더 기운내고 으샤 으샤 하자, 분명 내일은 더 나아질 거야, 그런데 내일 학교 나가면 이거랑 저거랑 그거랑 다 진행해야 하는데, 너무 해야 할 게 많다, 지금 일이 너무 몰린 거 아냐, 아니야, 다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자, 힘내자, 잠이 안 오네, 미치겠다.....


이런 의식의 흐름 속에서 잠이 안 오니 침대에 누워있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아이들은 잘 준비가 다 끝나서 아내와 옆방에 갔다. 옆방에서도 조금 뒤척이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아내도, 딸과 아들도 모두 피곤했던 것 같다. 다시 잠을 청해 본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으니...

으악! 잠이 안 와!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계속 힘들었던 오늘을 곱씹었다. 그러던 중 조그만 인영이 침대 근처로 다가왔다. 첫째 딸이었다. 5살 먹은 그 아이가 조용히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계속 자는 척했다. 혹시라도 깨어 있는 게 들키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귀찮게 할 게 분명하기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자는 척했다. 그 아이가 잠시 앉아 있다가 내 가슴 쪽에 손을 얹었다. 무엇을 하려는 걸까. 덩굴줄기처럼 뻗어나가던 나의 생각들이 순간 멈췄다.


토닥토닥


그것은 분명 잠을 재워줄 때의 손동작. 대부분의 부모라면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했을 재우기의 행동 교본. 꿈나라로 가는 누군가를 축복해 주는 손길. 얘가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이러는 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잠자는 척하는 연기는 때려치웠다.

"하랑아, 지금 뭐 하는 거야?"

첫째가 배시시 웃으면서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아빠 재워주는 거야. 아빠 힘들어? 힘들어? 그러니까 잘 자라고. 아빠 재워주고 나 자러 갈 거야."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을 야금야금 잠식하던 생각의 덩굴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냉혹한 대지에서 사나운 야생 동물과의 투쟁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야만인 전사가 허름한 움막 안에서 따스한 불로 몸을 녹이듯, 그날 서릿발 같은 수많은 일들로 인해 차갑고 딱딱하게 변한 내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아니, 이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 부담감이나 압박감이 일거에 뿅 하고 정말 없어지진 않았겠지. 하지만 그것들은 나에겐 더 이상 중요한 문제는 아니게 되었다.


내 마음은 위로받았다.




예전에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고3 때 입시 준비에 매진하면서 "대학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되니까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공부해!", "대학만 가면 여자 친구는 자동으로 생겨,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공부해!" 같은 말들만 학교의 선생님들에게 들어왔기 때문에 정말로 대학만 가면 여자 친구 등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라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기대감으로 대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입학한 대학은 문과 계열의 과만 있는 학교라 여학생이 엄청 많았다. 우리 과의 성비 비율도 그러했다. 신입생 약 25명 중 남자 5명, 여자 20명이었으니. 그래서 장밋빛 미래를 내 뇌가 무의식적으로 품었던 것 같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안 생겼다.


결국 안 생겨서 문제였다. 단순히 기대감이 깨진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서 심리적으로 조울증이 심했다. 감정의 기복도 컸다. 나는 잘 생기고 싶고 그렇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태생이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이 아니니, 내 외모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나를 좀먹었던 것이다. 특히 여학생들이 내 옆을 지나가다 웃기라도 하면 내 외모가 우스꽝스러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중증이었다. 대학교 가서 그렇게 학과에 여학생이 많은데 안 생기니, 역시 나는 못 생겼구나, 역시 잘 생겨야 이득이구나, 못 생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의 불필요한 생각을 계속 확대하면서 나는 내 영혼을 스스로 불행의 늪에 질질 끌고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는 자주 같이 통학하면서 지하철도 함께 탔던 여자 동기와 오랜만에 1호선 전철을 타고 집에 가는 중이었다.(그 친구는 좋아하는 남자 선배가 생기면서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내 상태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나 보다. 그 친구가 나에게 요즘 무슨 일 있는지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 답답해서, 그리고 그 친구는 인생을 나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성향이었기에 고민하다가 결국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들을 다 풀어놓았다. 그 친구는 한참 듣더니 나의 마음을 이렇게 토닥였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이 있잖아. 그것은 보통 이웃을 엄청 많이 사랑하라는 것으로 들리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거든. 네가 너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니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게 제일 중요해. 네가 없으면 네 이웃도, 이 세상도 없는 거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정해진 명령이라면 당연히 자기 자신을 먼저 뜨겁게 사랑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네가 너를 스스로 너무 낮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려 약 20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그때의 지하철 공간, 그 친구와 내가 함께 앉아 있던 구도, 내 눈을 응시하던 그 친구의 따스한 눈망울, 나를 격려하는 그 하나하나의 단어들. 그것들은 여태까지 잊힌 적이 없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말을 듣고서 바로 성격이 낙천적으로 변하고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등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이 단번에 해결되지는 않았다. 열등감을 해결하는 데는 거의 그 이후로도 6~7년 정도 걸린 것 같다. 하지만 친구의 토닥임은 내가 갖고 있는 문제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열등감이라는 우물에 매몰되어 있던 나에게 두레박을 내려주었다고나 할까. 내가 선택하면 언제든지 그 우물에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 있음을 알게 하여 준 것이다. 마음이 예전처럼 쉽게 꺾이지 않도록 안전장치가 고정되었다. 바로 내 마음에.




내가 사는 세상은 그동안 나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다. 다만 첫째 딸과 내 친구의 사소하면서도 한 순간의 토닥임이 나의 마음을 깊게, 내밀하게 토닥인 순간, 그렇지 않았던 세상이 호의적으로 보이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리그 그 순간의 위로는 잊히지 않는 영원이 되어서 지금도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래서 그 다음날 어떻게 되었냐고? 당연히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나의 제자들을 사랑하며 살았지. 부담감과 피로함을 견뎌내며.


위로받은 자의 삶은 누군가의 또 다른 위로가 된다.

위로는 힘이 세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들과 나의 황홀한 첫 경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