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정의, 누가 판단할 것인가?
-이 글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선과 악을 구별해 왔다. 여러 종교에서도 선한 자는 구원받으며, 천국에 다다르고 악한자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선과 악의 구별은 항상 쉽지 않았고 하버드 교수인 마이클 샌댈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강의를 통하여 정의의 기준을 판단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정의와 선악은 간단하게 분리할 수 없었고, 개인의 가치관이나 이데올로기에 따라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쓰리 빌보드는 이러한 선악의 개념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다. 우리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에 따라 선과악이 모호함이 공존한다.
누군가를 선이다 악이다라고 구별하기엔 매우 어렵다.
딸을 강간한 범인을 찾기 위해 경찰을 비난한 밀드레드는 마을에서 온갖 비난에 시달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를 그저 나쁜 사람이라고 정의할 순 없다. 강간당한 딸의 복수를 할 수 없을뿐더러 범인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엄마로서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일인가. 그런 와중 자신을 폭행하던 남편은 19세 소녀와 바람까지 났으니 그녀 또한 피해자 이자 동정받아야 할 인물이다.
그럼 밀드레드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찰들은 악인인가? 그 또한 우리는 쉽게 정의할 수 없다.
서장인 윌러비는 처음 등장할 땐 자신을 비난하는 광고판을 내리기 위해 협박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를 쉽게 악인이라고 판단할 때쯤 그는 사실 췌장암 말기를 앓고 있는 시한부 환자이자 가족의 가장임을 알게 되고 또한 사실 범인을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 노력파 형사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사후 자신을 비난한 간판을 유지하기 위해 광고판 비용까지 지불하는 모습을 보이며 그를 악인으로 판단하기 힘든, 오히려 선한 자의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기존의 인물들이 선악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악인은 결코 선한 사람으로의 변화는 불가능한 걸까??
극 중 딕슨은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흑인을 증오하고 고문하며 호모 포비아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오죽하면 윌러비의 죽음 이후 간판업자 레드 월비의 탓을 하며 그를 2층 창밖으로 밀어버리는 잔혹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는 한결같은 악인을 모습을 보여주지만 윌로비의 죽음 이후 그가 남긴 편지와 레드 웰비의 용서(오렌지주스)를 통하여 그는 전과는 180도 변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을 희생하면서 까지 범인을 잡으려는 모습을 보이는 입체적 인물로 표현된다.
영화의 결말은 어찌 보면 굉장히 허무하다. 시원한 복수도 없고 용의자가 진범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실 그건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감독은 그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선도 악도 그저 우리들 안에 내재되어 있으며 개인의 가치관 와 이데올로기, 사회적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윌로비가 남긴 편지와 레드 웰비가 건넨 주스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악인도 선한 이로 변화시킬 ‘사랑’과 ‘용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