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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Feb 23. 2023

글이 안 써지는 이유는?


매일 한 편의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지만 글쓰기가 쉽지 않은 날이 있다.

하루를 꼬박 보내고 밤 열두 시가 되어가는데도 글 한 줄 써지지 않을 때가 있다.

사실 종이에 펜으로 쓰는 글이 아니고 모니터를 보면서 타이핑하는 것이니까 엄격하게 말한다면 글을 쓰는 게 아니고 글을 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열 손가락이 있지만 타이핑 한 글자 치기도 어려운 날이 있다.

옛날 사람들이 보면 부러워 죽을 모습일 것이다.

20세기의 최고의 발명품이 뭐냐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세탁기의 발명이라고 한다.

덕분에 여성들이 세탁 시간에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온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전기의 발명이라고도 하는데 나로서는 키보드의 발명이라고 하겠다.

키보드 덕분에 엄청난 기록을 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엄청난 문명의 진보를 이룰 수 있었다.




국민학교 때를 생각해 보면 소풍에서 보물찾기 상품이나 운동회에서 달리기 상품은 언제나 연필과 공책이었다.

그때만 해도 공책이 귀했다.

공책만이 아니라 종이 자체가 귀했다.

할머니 집에 매일 넘기는 달력인 일력이 있었는데 그 얇은 종이는 화장실에 갈 때 정말 요긴하게 사용했었다.

연필도 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연필을 잘 깎는지 가르쳐주기도 했는데 당시 국산 연필은 연필심이 너무 자주 부러졌다.

그러면 침을 묻혀서 쓰기도 했는데 일본산 연필처럼 부드럽고 튼튼한 연필이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연필과 함께 따라오는 지우개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지우개는 한번 쓰윽 문지르기만 해도 잘 지워졌는데 안 좋은 지우개는 지우개가 아니라 고무 막대기 같았다.

괜히 문질렀다고 종이만 찢어버리곤 했다.

그래도 그 시절은 아버지 적 시절이나 할아버지 적 시절보다 훨씬 나았다.




조선시대에는 해마다 날씨 좋은 날을 택해서 책을 세탁하는 ‘세초(洗草)’하는 날이 있었다고 한다.

원래는 실록 같은 중요한 책들을 물에 빨아서 그 기록을 지우는 것인데 기록이 지워지면 깨끗한 책이 되니까 그 책에 새로운 기록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지로 만들어진 책을 재사용하는 일이 세초였다.

물에 세탁해서 쓸 만큼 종이가 귀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 중에 종종 글을 쓰고 싶은데 종이가 난처해하기도 했다.

한번은 자기 부인이 시집올 때 입었던 치마를 보냈는데 그것을 잘라서 책을 만들었다고 한다.

선비들에게 가장 필요한 글쓰기의 재료인 종이, 붓, 먹, 벼루를 모아서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칭송하였을 만큼 글쓰기의 도구가 귀했다.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대나무를 잘라서 납작하게 만들고 그것들을 서로 엮어서 그 판때기 위에 글을 썼었다.

그래서 책을 지칭할 때 ‘엮을 편(編)’자를 쓰게 된 것이다.




서양에서는 양의 가죽을 얇게 떠서 종이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양피지(羊皮紙)라고 하는 이 재료를 얻으려면 양 한 마리를 잡아야 했다.

양 한 마리의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돈이 없는 사람은 글쓰기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양피지에 글을 쓰다가 실수할까 봐서 미리 흙바닥에다가 글 쓸 내용을 연습으로 써 보기도 했다.

이집트에서는 파피루스라는 식물을 으깨고 말려서 그 위에 글을 썼다.

글 한 편 쓰기 위해서 옛사람들은 엄청난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허튼 말은 철저히 배제하고 갈고닦아서 글을 썼다.

옛 문헌의 한 글자 한 글자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그만큼 중요한 글만 간추려서 썼기 때문일 것이다.

옛사람들을 생각하면 데스크톱, 노트북, 태블릿, 스마트폰에 블루투스 키보드만 5개가 있는 나는 큰 부자요 갖출 것 다 갖춘 사람이다.

그런데도 글이 안 써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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