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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Feb 24. 2023

슬픔도 고통도 모두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이가 이만큼 먹어서 그런지 요즘 주위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예전보다 몸이 안 좋아졌다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일단 나부터가 그렇다.

눈 시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는데 노안이 왔는지 책을 읽을 때 글자가 흐릿해 보인다.

달리기만큼은 남들보다 잘 뛴다고 했는데 지금은 뛴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게 느껴진다.

집에서는 연일 살 빼라고 잔소리를 하는 식구들이 있다.

나도 10년 전의 내 사진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른들이 종종 젊었을 때의 사진을 보기 싫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건강 외에도 집안의 대소사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들의 말과 얼굴에서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슬퍼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인생이란 게 다 그렇지 뭐.”라며 관조적인 말을 한다.

이것도 인생의 한 부분인 것 같다.




죽음학의 대가로 알려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생의 큰 위기에 닥친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상태를 부정, 분노, 슬픔, 타협, 수용이라는 5가지 단계로 설명했다.

처음에는 ‘아닐 거야. 뭔가 잘못 본 것일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다시 검사하고 또 검사를 한다.

결과는 처음과 같다.

그러면 ‘왜 하필 나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나님이 살이 있으면 이럴 수 있어?’라며 분노의 감정을 쏟아놓는다.

그러다가 자신의 모습이 너무 슬퍼진다.

자신이 인생도 슬프고 자신이 떠나면 남겨질 가족들도 슬프다.

이 단계를 지나면 주변 사람들과 타협을 한다.

‘내가 가더라도 너는 이래야 한다. 약속하자.’는 식이다.

하나님과도 타협한다.

'제발 우리 가족들을 잘 보살펴주세요.'라고.

그리고 이 단계도 지나면 그다음에는 겸허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살아오면서 정말 좋았던 것, 의미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감사한다.




비단 죽음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는 고통들은 대체로 이런 패턴을 그린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다섯 단계를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부정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부정의 단계를 넘어서 분노의 단계에 머물러버리기도 한다.

가장 좋은 경우가 수용의 단계에 이르는 것인데 그런 경우를 보기는 정말 어렵다.

건강할 때는 곧 죽어도 괜찮다고 말을 하다가도 막상 독한 질병에 걸리면 살고 싶다고 부르짖는다.

자신의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수용의 단계에 이른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런 점에서 많은 유익을 누릴 수 있다.

종교는 현실의 삶도 중요시 여기지만 내세의 삶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힘들지만 내세에 더 좋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면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훨씬 수월하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교에 열심은 아니더라도 깊은 명상이나 수행을 통해서 내적인 힘을 기르는 이들도 있다.

내적인 힘이 생기면 인생의 희로애락을 삶이라는 스펙트럼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과정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생겨나는 때가 있으면 소멸되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무에 불이 붙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작은 불씨였다가 점차 큰 불이 된다.

가장 큰 불꽃을 피우고 나면 서서히 불꽃이 작아진다.

그리고 불씨가 되고 재가 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처럼 삶에도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고 웃음이 있으면 울음도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학문을 통해서 이런 경지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다.

모든 학문은 결국에는 서로 연결된다고 하는데 그 최종 연결점은 인생의 질문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지금 내가 나이 들어 힘든 일이 많아졌다면 내 아이들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이다.

슬픔도 고통도 모두가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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