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강한 힘은 군사력이 아니라 문화력에 있다

by 박은석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 장수로서 조총부대를 이끌던 사야가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집안은 일본에서도 꽤 유명세가 있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잠식당한 상태였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내친김에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사야가에도 출병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미 사야가의 아내와 딸은 히데요시에게 볼모로 잡힌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전쟁터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사야가는 명분 없는 전쟁에 환멸을 느꼈다.

왜군이 부산진을 점령한 다음날 사야가는 몰래 편지를 써서 조선군에게 보냈다.

그 편지에는 조선으로 귀화하고 싶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후 사야가와 그의 부하들에 대한 기록은 일본군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사야가가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 육군에 잘 훈련된 조총부대가 생겼고 그들의 활약상은 눈에 부실 정도였다.

그 조총부대를 이끌었던 장군이 바로 일본군에서 사라진 사야가였다.




사야가의 편지는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전해졌다.

그 편지를 받은 박진은 많은 생각 끝에 사야가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렇게 해서 사야가는 자기 부하 500명과 함께 조선에 귀화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온 조총으로 조선 육군을 훈련시켰고 조총과 화포 및 화약을 제조하는 기술도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조선 육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왜군 부대에 밀리지 않는 전투태세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사야가가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전투를 보면 조선 육군은 왜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임진왜란 개전 20일 만에 왜군이 부산에서 한양까지 진격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야가 장군의 등장 이후에는 왜군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육지에는 사야가 장군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야가 장군이 없었더라면 임진왜란의 판세가 어떻게 기울었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야가가 조선으로 귀화한 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장수가 명령을 어기고 투항한 것이다.

죽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사야가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조선의 백성들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순간에도 늙으신 부모님을 살리려고 등에 업고 뛰는 모습을 본 것이다.

일본인들 같으면 자기 혼자 살려고 줄행랑을 칠 텐데 조선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야가는 큰 문화충격을 받았다.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작성한 <모하당문집(暮夏當文集)>을 보면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앞서 있고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이기 때문에 짓밟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자신이 귀화한 것은 개인적인 영달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군자의 나라에서 살고 싶고, 자기 후손을 예의 바른 나라에서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선조 임금은 사야가의 공로를 인정하여 사야가에게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서 금을 얻었다는 뜻으로 김해(金海) 김(金)씨 성을 하사했다.

그리고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으로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승정원일기>에서는 김충선을 담력이 뛰어나고 성품 또한 공손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도 김충선은 여진족의 침입에 대항해 싸웠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도 공을 세웠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다.

그는 태생이 조선인은 아니었지만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위해서 싸웠다.

일본은 사야가 김충선의 이름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하였다.

한국인들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폄훼하였다.

하지만 역사는 감추어지지 않는다.

사야가 김충선은 버젓이 우리 앞에 등장하였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진정 강한 힘은 군사력이 아니라 문화력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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