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궁궐이 몇 개인지 아느냐고 물어보면 대개 경복궁과 창덕궁 정도는 대답한다.
5개의 궁궐이 있다고 하면 머리를 굴리면서 궁궐의 이미지가 있는 곳을 댄다.
덕수궁이 떠오를 것이다.
2개는 무엇일까?
솔직히 나도 조선의 궁궐에 대한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다.
조선의 궁궐이 5개라는 것을.
조선의 궁궐은 정궁인 경복궁을 비롯하여 대왕대비와 왕비들이 기거했던 창경궁, 그리고 창덕궁과 덕수궁, 경희궁의 다섯이다.
창덕궁은 태종 이방원 때 경복궁 대신 왕궁으로 삼기 위해 지어졌다.
그래도 정궁인 경복궁이 있는데 굳이 창덕궁을 고집할 필요가 있냐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중에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버리자 창덕궁은 긴 시간 동안 여러 임금이 거주하는 궁궐이 되고 말았다.
덕수궁은 대한제국 시절에 고종황제가 기거한 황궁이었고 경희궁은 인조반정 이후 철종 임금에 이르기까지 임금들의 거처가 되었다.
한양에 있는 조선의 궁궐은 이렇게 5개가 되는데 한양 이외에도 궁궐이 있었다.
한양 밖에 있는 궁궐은 임금이 잠시 머무르는 궁궐이라는 의미에서 ‘행궁’이라고 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임금이 잠시 여행하는 중에 머무르는 숙소라고 할 수 있겠다.
전란이 나면 임금이 피난 갈 최적의 장소로 강화도를 꼽았다.
그러니 강화도에 임금의 거처인 행궁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만약 강화도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면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모시게 하였다.
그래서 남한산성에도 행궁이 있다.
숙종 때는 북한산성에도 행궁을 건설했다.
사실 북한산성은 임금이 피하기에는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곳으로 갈 수도 있으니 양주행궁을 건설했다.
정조대왕은 수원에 화성을 지었다.
계획도시를 만든 것이다.
그곳에 임금이 거하기를 원했기에 수원에는 화성행궁이 있다.
이외에도 온양, 의주, 부안, 전주 등 여러 곳에 행궁이 있었다.
한양에 있는 왕궁이든 각 지방에 있는 행궁이든 궁궐에 들어갈 때는 자그마한 다리를 하나 건넌다.
다리 아래로는 물이 흐른다.
임금은 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임금을 만나러 갈 때는 몸과 마음을 씻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고 부른다.
왕궁뿐 아니라 왕릉에도 금천교가 있다.
왕궁은 임금이 살아 있을 때 거하는 곳이고 왕릉은 임금이 죽은 후에 거하는 곳이다.
왕이 거하는 곳이기 때문에 왕궁과 왕릉은 비슷한 구조를 띠고 있다.
어쨌든 우리 조상들은 임금을 만나러 가려면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임금을 만나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이었고 성스러운 일이었다.
당연히 임금과 정사를 논하는 자리는 매우 중차대한 자리였다.
하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여 백성들을 잘살게 해야 했다.
백성이 곧 하늘이기 때문에 백성을 위한 정책을 세우려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야 했다.
궁궐의 주재료는 나무와 흙이다.
나무는 통째로 사용했다.
잘라 붙이는 일은 없었다.
긴 통나무에 홈을 파서 서로 짜 맞췄다.
조금이라도 오차가 있으면 짜 맞출 수 없기 때문에 궁궐을 만드는 일은 정교한 실력자들만이 감당할 수 있었다.
벽은 흙으로 세웠다.
흙을 말린 벽돌과 흙을 구운 기와로 건물의 외관을 덮었다.
그래서 궁궐 구경을 할 때면 건물 안에 머리를 들이밀고 천정을 보고 서까래를 보고 기둥과 창문, 벽과 바닥과 기와를 보면서 건축가들의 기술을 상상해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 된다.
기둥으로 세운 나무 밑에는 돌로 받침판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 받침돌이 네모나게 각진 것도 있고 둥근 것도 있다.
사람이 자주 드나드는 숙소 같은 경우는 받침돌에 발이 부딪히지 않도록 둥글게 만들었다.
창고 같은 곳은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못하도록 네모나게 만들었다.
이 정도만 알아도 궁궐 구경하는 재미가 새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