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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Oct 01. 2020

보온병이 부럽다


가끔 쉬는 날에는 가까운 산에 오른다. 운동화만 신고 올라가도 되지만 그래도 이래저래 자잘한 물건들을 챙겨서 한 배낭 짊어지고 간다.


판초우의, 돗자리, 생수 두 병, 모자, 흐르는 땀을 막아줄 머리띠, 팔토시, 혹시 모를 비상상황 때 써야 할 두루마리 휴지. 그리고 정상에서 산공기와 버무려 먹을 도시락.


도시락이라고 해서 거창한 것은 아니다. 밥솥에서 밥 한 주걱 떠서 비닐봉지에 담고, 김치 조금, 오이 한 토막, 쌈장 한 숟갈, 고추 2개 그리고 사발면을 배낭 안으로 집어넣는다.

아참, 갓 끓은 물을 담은 보온병. 이렇게 산에서의 점심식사 준비를 마치면 마음은 벌써 정상이다.     




야트막한 산이라도 해발고도 500미터가 넘고 입구에서 3킬로미터 정도 걸어야 하니 정상 근처 쉴만한 곳까지 가려면 한 시간 반은 족히 넘는 산길을 올라야 한다.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적당히 엉덩이 붙이고 다리 뻗을 수 있는 바위를 찾으면 그곳이 곧바로 식탁이 된다.


배낭 안에 고이 모셔진 먹거리들을 꺼내서 벌여놓고 사발면을 뜯어놓으면 왕후장상의 식탁이 부럽지 않다. 혹여나 물의 온도가 너무 낮지 않을까 조심스레 걱정을 해 보지만 보온병의 위력은 실로 대단하여 집에서 나온 지 두 시간도 훨씬 지났지만 손 담그면 델 듯한 뜨거움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산에 올라본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사발면과 보온병은 어느 누가 개발했는지 모르지만 천상의 조화이다.     



라면 같은 즉석음식은 몸에 안 좋다는 소리는 산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아마 우리나라 라면회사는 등산객들이 먹여 살린다고 해도 믿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제 아무리 맛있는 라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뜨거운 물이 없으면 그저 튀긴 밀가루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작아작 생라면을 씹어 먹는 묘미도 있지만 어찌 삶은 라면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산에서 불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뜨거운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보온병뿐이다. 그래서 산에 오를 때 가장 톡톡한 효자노릇을 하는 것은 보온병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뜨거운 물 대신에 이 보온병에 얼음물이나 냉커피, 식혜를 담아서 정상까지 가지고 갈 수도 있다. 몇 시간이 지나도 물의 온도를 적절하게 유지시켜주는 보온병은 참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다.     




한 여름의 더위에서도, 한 겨울의 추위에서도 자신이 품은 물을 보호해주고 그 온도를 지켜주는 보온병을 생각하며 나를 돌아본다.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진다. 나는 내 안의 온도를 잘 지키고 있는 것일까?


옆 사람의 한 마디에 쉽게 달아올랐다가 금새 식어버리는 일들이 얼마나 잦았는지 일일이 셀 수가 없다. 벌겋게 흥분했다가 차갑게 낙심해버리는 내 마음은 도저히 보온의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온병 뚜껑에 달려있는 고무패킹이 삭아버리면 더 이상 보온이 안 되는 것처럼 내 마음의 온도를 보호해주는 패킹이 망가졌나 보다. 그래서 내 안의 온도가 너무 쉽게 밖으로 빠져나가버린다.     


망가진 보온병은 만든 곳으로 보내서 애프터서비스를 받으면 멀쩡해진다. 망가진 내 마음도 애프터서비스를 받아야 하는데, 아! 망가진 내 마음은 어디로 보내야 하나?

보온병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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