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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Oct 04. 2020

나는 조연이지만 주인공이다


오페라 <투란도트>를 보며 내 삶을 돌아보았다.

한때는 굉장히 고상하고 심오한 척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하는 개똥철학을 품고 지냈다. 그리고 또 한때는 타오르는 불길처럼 꺼지지 않는 사랑과 열정을 부여잡으려고 했다.

그리스 신화 속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내 생각에 맞지 않으면 과감하게 그것은 아니라고 거부하기도 했다.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좋았다. 한 번 사는 인생 똑 부러지게 살고 싶었다.

뜨겁든지 차갑든지 둘 중의 하나이어야지 미지근한 것은 싫었다.

그런 삶이 멋있고 폼 나는 인생처럼 보였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는 말처럼 사람들도 폼 잘 잡는 사람을 좋아한다.


인생극장의 주인공이 되려고 남들보다 더 빨리 가고 더 높게 오르며 더 강해지려고 했다.

결과는 주인공인 나만 남았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인공들은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사랑과 열정을 불태운다.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는 책으로도, 영화로도, 음악과 미술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인생은 결국 사랑이기에 아름다운 사랑을 쟁취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 속에 풍덩 빠져들고 보면 사랑으로만 살 수 없는 것이 또한 인생임을 알 수 있다.

그놈의 사랑 때문에 오히려 인생을 통째로 망쳐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스무 해도 살아보지 못한 청춘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죽음을 택하지 않고 사랑의 불길을 조율하면서 긴 인생을 살았더라면 어땠을까?

웬 미치광이가 나타나서 독약이 든 병을 깨뜨려버린다든가 단검을 뺏어버린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로미오와 줄리엣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 미치광이가 주인공이 될 것이다.

나는 그게 더 재미있겠다.




푸치니가 작곡한 오페라 <투란도트>에는 다양한 인생 군상이 나온다.

모든 것이 많은 중국 베이징을 배경으로 하니 등장인물들의 숫자도 엄청나게 많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주목을 많이 받는 세 사람이 있다.

 

할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후 이민족의 남자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투란도트 공주는 그야말로 냉혈 여자이다.

이런 무서운 여인을 사랑하는 칼라프는 열정적인 사랑의 소유자이지만 패망한 나라의 왕자로서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못한 채, 생(生)과 사(死)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그리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줄 알지만 일편단심 칼라프를 짝사랑하는 류는 왕자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런 신파극 같은 이야기가 알아듣도 못하는 이탈리아 노래로 2시간 내내 이어지면 관객들은 질려버릴 것이다.




그러나 <투란도트>는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진정한 사랑과 인생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그 이면에는 팽팽한 긴장감을 풀어주며 시간에 등장하는 익살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핑’, ‘팡’, ‘퐁’이라는 조연들인데 때로는 무섭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면서 인생살이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름부터가 웃기다.

어디서 핑, 팡, 퐁 튀어 올랐다가 풍선처럼 여기저기서 핑, 팡, 퐁 소리와 함께 터져버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들의 실제 역할도 갑자기 드러났다가 조용히 물러난다.

<라 트라비아타>, <카르멘>, <사랑의 묘약>과 함께 <투란도트>가 세계 4대 오페라라는 찬사를 받는 데는 핑, 팡, 퐁의 연기가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들은 <투란도트>의 조연으로 연기를 하면서도 또한 핑, 팡, 퐁이라는 인생극장의 주인공으로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연기를 감당한다.

그래서 극이 끝나면 관중들은 그들에게 “브라보”를 외치며 큰 박수갈채를 보내게 된다.


우리도 핑, 팡, 퐁처럼 이 거대한 세상에서 한 명의 조연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나 자신의 삶의 무대에서는 언제나 내가 주인공이다.

조연이지만 또한 주인공으로서 최선을 다해 나의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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