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Jun 16. 2023

글은 그림이고 노래이다

어떤 글은 그림이 된다.

보이는 것은 종이 위에 쓰인 글자인데 그 글을 읽는 순간 내 눈앞에 그림이 펼쳐진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나만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모른다.

글쓴이가 의도적으로 나에게만 보여주는 그림일지.

그렇다면 글쓴이와 나만의 비밀스러운 글이다.

우리 둘만 알고 있는 암호문 같은 것이다.

글을 따라 산과 들이 펼쳐진다.

시냇물이 파랗게 흘러들고 길 따라 집들이 펼쳐진다.

사람들이 보인다.

어릴 적 함께 놀던 친구들은 여전히 소년이고 소녀이다.

밤하늘 별을 보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는 여드름 많은 사춘기 아이도 보인다.

돼지 한 마리 잡아서 잔치를 벌이는 신랑신부와 두 팔 벌려 어린 손주를 맞이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보인다.

뭐가 좋은지 강아지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컹컹 짖어댄다.

매화꽃 벚꽃 코스모스 샛노란 은행잎이 한꺼번에 보인다.

글이 한 폭의 그림이다.




어떤 글은 노래가 된다.

종이 위에 가지런히 가갸거겨 글자들이 달리는데 그 글을 읽는 순간 입에서 노래가 나온다.

다른 사람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나만의 새로운 노래이다.

모른다.

이것도 글쓴이가 나에게만 들려주는 노래일지.

그렇다면 글쓴이와 나만의 비밀스러운 글이다.

우리 둘만 알고 있는 세레나데 같은 것이다.

글을 따라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진다.

음이 생긴다.

다다다닥 달려가는 호흡 빠른 음이 되었다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느린 음도 된다.

구구절절 애간장을 태우기도 하고 꺼이꺼이 흐느끼게도 한다.

눈물 콧물 다 쏟아내면 이번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안한 자장가처럼 들린다.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은 아이 마냥 기쁨에 겨운 탄성이 터져 나온다.

행진하듯이 위풍당당하게 기쁨의 찬가를 부른다.

한숨 자고 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갈 것이라는 선문답 같은 소리도 들린다.

글이 한 곡의 노래이다.




글은 단숨에 휘리릭 써지지 않는다.

한 땀 한 땀 날줄과 씨줄을 엮어서 옷을 짓듯이 한 글자 한 글자 엮어서 글을 짓는다.

어디에 무슨 색을 넣을지 어디에서 어떤 색을 빼야 할지 작가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화가는 연필을 가지고 쓱싹쓱싹 데생을 하고 그 위에 물감으로 색을 입힌다.

이 일을 작가는 글로 한다.

썼다 지웠다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굵은 글씨로 마무리를 짓는다.

한 귀퉁이의 그림만 봐서는 전체의 그림을 다 알 수 없듯이 글도 한 부분만 봐서는 전체를 볼 수 없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쪽 대각선 꼭짓점에서 저쪽 대각선 꼭짓점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그림을 보듯이 글도 첫 장부터 끝장까지 다 읽어보아야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좋은 그림은 부분만 봐도 좋지만 전체를 보면 더없이 좋다.

글도 그렇다.

한 문장만 읽어도 그림이 그려지지만 전체를 읽으면 명작이 된다.

글은 한 폭의 그림이다.




글은 한 호흡에 읽히는 것이 아니다.

한소리 또 한소리를 냈다 쉬었다 하면서 노래하듯이 글도 한 글자 한 글자 교차하면서 노래한다.

어디에 어떤 가락을 넣을지 어디에서 어떤 빠르기로 읽힐지 작가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작곡가는 오선지에 콩나물을 그렸다 지웠다 수없이 반복하다가 곡을 완성한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오선지에 마음으로 콩나물 대가리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수없이 반복하다가 굵은 펜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한 소절의 음만 들어서는 그 노래를 다 알 수 없다.

글도 한 자락만 읽어서는 전체가 무엇을 노래하는지 들을 수 없다.

첫 음부터 마지막 음까지 들어야 전체 노래를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야 글의 노래를 알 수 있다.

좋은 음악은 한 소절만 들어도 좋지만 전체를 들으면 더없이 좋다.

글도 그렇다.

한 단어만 읽어도 흥얼거려지지만 전체를 읽으면 명곡이 된다.

글은 한 곡의 노래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을 찾아보는 습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