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의 늪에 빠져간다

by 박은석


머리 염색을 했다.

아주 오래전에 서른 즈음에 염색을 했던 적이 한 번 있는데 그 후로 처음이다.

흰머리가 점점 많아지니 주변에서 안쓰러워 보였는지 염색하라는 말들이 많았다.

나는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해서 흰머리가 많아져도 괜찮다.

그래도 주변에서 하도 성화가 이니까 염색 한 번 하기로 했다.

너무 새까만 색깔로 하지 말고 부드러운 색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가끔 어르신들 중에서 피부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색으로 머리 염색을 하는 분들이 있다.

머리카락이 너무 새까맣다.

나름대로 고민을 했을 테지만 나는 노화된 피부와 어울리지 않는 그 새까만 머리 색깔이 어색해 보인다.

자연스럽게 조금 물 빠진 색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눈치 빠른 미용사는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며 정성껏 작업을 했다.

색깔이 잘 나왔다.

거울을 보니 확실히 젊어 보인다.

기분이 좋다.

염색을 한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다.




좋은 기분은 한 주간을 넘게 갔다.

두 주간도 넘게 갔다.

이제 내 머리 색이 이 색깔이라고 받아들이게 될 즈음이었는데 머리카락 뿌리 부분에서 하얀색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두 주간 동안 내가 몇 살은 더 젊어진 줄 알았다.

그렇게 보였다.

마음도 몸도 젊어진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다시 흰머리를 보는 순간 기분이 가라앉았다.

몸도 마음도 순식간에 몇 살은 더 먹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봤자 원래 내 나이로 돌아온 것뿐인데 그래도 기분이 나빠졌다.

머리 위는 거무스름한데 머리 뿌리는 하얘지니 더욱 보기가 싫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염색하기로 했다.

이래서 사람이 한 번 염색의 세계로 들어오면 그 세계를 빠져나갈 수 없나 보다.

이번에도 미용실 원장님이 깔끔하게 염색해 주었다.

그렇지만 지난번처럼 염색에 대한 감동이 들지는 않았다.

한 달 후에 다시 염색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카락 색깔이 뭐라고 그 색깔 하나에 사람의 기분이 오락가락할까?

조금 흰 것이나 조금 검은 것이나 거기서 거기일 텐데 그 미묘한 차이 때문에 한 주, 두 주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한다.

머리카락 색깔이 하얗다고 해서 내 나이가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머리카락 색깔이 검다고 해서 내 나이가 적어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머리카락 색깔을 보면서 내가 나이 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젊어졌다고 하기도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기분이 나빠지기도 하고 좋아지기도 한다.

내가 살아가는 게 이런 식이다.

본모습은 생각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만 쉽게 판단해 버린다.

본모습은 감추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잘 보이려고 한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도 겉으로 드러나는 내 모습만 볼 테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에만 집중한다.

굳이 나의 본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철저히 내 본모습은 숨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숨기려고 한다고 해서 내 본모습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다.

시간이 지나면 머리카락 뿌리에서 하얀색이 올라오듯이 시간이 지나면 내 본모습도 드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염색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이 내 본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게 후다닥 색깔을 갈아입혀야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타이밍을 놓쳐 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사람들이 내 본모습을 보고 놀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염색이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했던 사람인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염색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숨김없는 것을 좋아했는데 숨기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염색 하나가 불러온 변화이다.

머리카락 색깔처럼 그 사소한 것이 나를 규정짓고 나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 버렸다.

별것 아니라고 하면서도 그것에 빨려드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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