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을 타고 10년 전, 20년 전으로 가서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할까? 그 당시 내가 고민하고 있던 문제들에 대해서 명쾌한 대답을 줄 수 있을까? 내가 선택한 인생의 길이 좋은 길인지 아닌지 알려줄 수 있을까?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말을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말이 있다.
과거의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좋은 고민이라는 것, 과거의 내가 선택한 인생의 길이 좋은 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그때 다른 고민을 하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인생이 좋은 인생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그 인생에도 기쁜 일과 슬픈 일이 있고, 웃음도 울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삶과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 중에서 어떤 게 좋은 삶인지는 선뜻 대답할 수 없다.
“인생 별것 있어? 다 거기서 거기지 뭐.”라는 말이 정답인 것 같다.
나도 내 삶에 대해서 썩 만족하는 편은 아니다.
어떤 때는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이건 내 삶이 아니야.’라는 생각을 한다.
내 인생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왜 하필 나야?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꼬여? 난 틀렸어. 뭘 해도 안돼.’라는 생각도 한다.
내 인생에 대해서 분노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내가 믿는 하나님과 협상을 벌이기도 한다.
‘하나님, 이번 한 번만 봐주신다면 제가 정말 하나님께 잘할게요. 정말 좋은 일 많이 하며 살게요.’라는 식이다.
물론 하나님으로부터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이런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우울한 마음이 든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차라리 이렇게 끝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 단계들을 지나면서 나의 삶이 바뀌어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바뀌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온다.
그리고 겸허히 내 삶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죽음학의 대가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그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의 표현과 삶의 모습들을 연구하였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겪는 삶의 단계를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죽음의 5단계라고 부르기도 하고 분노의 5단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다섯 가지는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이다.
그런데 이 5단계는 꼭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내 삶의 모든 면에서 이 5단계가 나타난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이지만 5단계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니까 좋은 것도 고만고만하게 여겨지고 안 좋은 것도 고만고만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면 처음에는 내 삶이 부끄럽고 다른 사람의 삶이 한없이 부럽다.
그러나 종국에는 내 삶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평을 내리게 된다.
이렇게 평을 내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삶에는 끝이 있기 때문이다.
그 끝에 이르게 되면 모두가 거기서 거기다.
지리산 종주를 했던 때가 생각난다.
새벽에 노고단에 올라서 종주를 시작했다.
오르막길도 있었고 내리막길도 있었고 평지와 같은 길도 있었다.
바위틈을 걷기도 했고 숲길을 걷기도 했다.
남들보다 빨리 가려고도 했고 남들을 먼저 보내고 한동안 쉬었다 가기도 했다.
하룻밤 묵을 산장에 도착했더니 먼저 온 사람도 거기에 있었고 나중에 오는 사람도 거기로 왔다.
큰 배낭을 짊어진 사람도 있었고 작은 배낭을 지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고작 한 평 정도밖에 안 되는 구역 안에 잠자리에 폈다.
새벽 일찍 길을 떠나는 사람이 있었고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잤다가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도 모두 산 아래에서 만났다.
다 거기서 거기였다.
지리산 종주처럼 우리 삶도 끝에 가면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