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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Jul 12. 2023

빈방과 꽉 채운 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산다

휴가철이 시작되어 사무실에 빈자리가 생겼다.

갑자기 공간이 넓어진 느낌이다.

공간이 넓어진 만큼 일도 많아지겠지만 그래도 숨통이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동안은 나의 행동반경이 요만큼이었는데 갑자기 이만큼 늘어난 것 같다.

두 명이 한 사무실을 사용했던 사람들은 한 명이 휴가를 떠남으로 인해 사무실을 독차지하게 된다.

그 안에서 자기가 주인이 되고 왕이 된 기분일 것이다.

자기만의 방이 생겼으니 더 의욕적으로 일을 한다.

자신이 그 방의 주인이라는 생각에 더 막중한 책임의식을 느낀다.

100년 전 영국의 여류 소설가인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면 더 열심히 삶을 영위할 수 있겠다고 했다.

그때는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게 쉽지 않은 시절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이라고 해서 상황이 많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자기만의 방을 갖기가 수월치 않다.




내가 나만의 방을 얻게 되었던 것은 중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2남 4녀 중에서 네 번째로 태어났으니 아무리 장남이라고 하더라도 누나 셋에 밀려 있어야 했다.

누나들이 하나씩 집을 떠날 때마다 방이 넓어졌고 아버지가 집을 넓혀주시는 바람에 방이 더 생겼다.

드디어 나에게도 내 방이 생겼다.

동생과 함께 쓰는 방이 아니라 오직 나만의 방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

그 방에 내가 들어가는 순간 텅 빈 방이 아니라 내가 있는 방이 되었다.

내가 그 방의 주인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그 방을 꾸며가기 시작했다.

책상을 들이고 옷장을 들이고 침대를 들였다.

책상 위에는 책꽂이를 올렸고 책꽂이 아랫단에는 자명종 시계와 라디오를 두었다.

서랍에는 필기구를 두었다.

책상 옆에는 기타를 놓았고 옷걸이에는 그날 입었던 옷을 걸었다.

천장 모퉁이에는 스피커를 매달았다.

음악을 틀면 사방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나만의 공간이 생겨서 좋았는데 나는 그 공간을 다른 것들로 채우고 있었다.

공간을 채우면 그만큼 나만의 공간이 줄어든다.

그런데도 나는 좋다고 했다.

이것저것 자리를 잡아서 굉장히 어수선한 방일 것 같지만 나에게는 가장 편한 방이었다.

전에 내 방이 없을 때는 동생과 한방을 썼다.

그 방에는 물건들이 많았다.

복잡했다.

싹 정리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내 방이 생겼다.

빈방이다.

복잡한 물건들이 없어져서 좋겠다 싶은데 그러지 않았다.

나는 빈방이 어색했다.

뭔가 부족하고 불완전해 보였다.

그래서 그 방을 다른 것들로 채웠다.

채우면 비우고 싶고 비우면 채우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가 보다.

그렇게 일평생 사는 것 같다.

한때는 이것저것 사들이고 조금 지나면 그것들을 내보낸다.

한때는 넓은 집으로 이사해서 좋다고 했는데 조금 지나면 너무 넓어서 부담스럽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다.




우리는 꽉 찬 공간과 빈 공간 사이를 오가면서 인생을 산다.

크고 넓은 건물에서도 작고 좁은 자기 사무실로 들어가야 안정감을 느낀다.

사무실에서도 한 귀퉁이에 있는 자기 자리가 제일 편하다.

구중궁궐 구십구 칸의 방을 만들어도 임금이 잠을 자는 방은 고작 한 방이다.

넓어서 좋은 게 아니라 좁아서 좋은 것이다.

휴가를 떠나는 우리의 마음도 그렇다.

넓은 집을 떠나서 좁은 집으로 가는 것을 휴가 잘 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편한 곳을 떠나서 불편한 곳으로 가는 것을 휴가 잘 가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우리가 꿈꾸는 것이란 지금 누리고 있는 환경을 잠시 벗어나는 것인가 보다.

지금은 동료가 휴가를 떠나는 바람에 사무실을 독차지해서 좋아하지만 조금 지나면 동료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란다.

없으면 좋고 있으면 더 좋은 거다.

빈방이 생기면 좋고 그 방을 채우면 더 좋은 거다.

오늘도 나는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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