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의 역사를 도둑맞은 기분이다

제주 4.3 희생자들을 기억하며...

by 박은석


제주 4.3지원과 보상지원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증조할머니에 대한 보상금 지급이 결정되었다.

몇 달 전에 브런치에 글을 올렸지만 50 평생 살면서 증조할머니께서 4.3 때 희생당하셨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버지도, 할머니도 나에게 얘기해주지 않으셨다.

나뿐만 아니라 누나들도 전혀 몰랐다.

6촌 동생이 4.3지원과에 보상금 신청을 했다는 것도 그때 어머니를 통해서 들었다.

2명 이상이 신청해야 한다고 하니까 어머니도 신청을 하셨다.

보상금 지급이 확정되었다는 서류를 보니 이미 2003년에 4.3희생자로 결정되어 있었다.

그 사실도 이번에야 알았다.

전체 보상금이 9천만 원이다.

이 금액을 증손자까지 촌수에 따라 차등을 두어 분배한다.

6촌 동생은 직계 후손이니까 나보다 보상금액이 많다.

우리 형제들은 40만 원씩 보상받는다.

명단을 보니까 모두 70명이 넘는다.

멸절되었을 것 같은 가문이 그래도 살아남았다.




보상절차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려고 제주 4.3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희생자 가족을 대해서 그런지 친절하게 전화를 받아주었다.

서류는 무엇을 준비하고, 서류를 보낼 때는 등기로 보내달라고 했다.

내가 홈페이지 들어가서 다운받겠다고 하니까 홈페이지에 공지사항이 있는데 공지사항 몇 번째 항목이라고 안내해 주었다.

너무 친절하게 대해서 귀찮을 정도였다.

빨리 전화를 끊으려고 인사를 하는데 “잠깐만요.

그런데 희생자가 2분이신 건 아시죠?”

‘엥? 이게 무슨 말이지?’

얼떨결에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증조할머니에 대한 보상이고, 아직 한 분에 대한 보상지원은 심의 상태인데 나중에 결정되면 알려드릴 거예요.

자세한 안내는 카톡으로 보내드릴게요.”

전화를 끊고서 잠시 멍했다.

‘누구지? 그 한 분이란 분은?’

증조할머니가 희생되셨다는 사실도 얼마 전에야 알았는데 다른 한 분이 더 있다는 사실이 의아했다.




조금 후에 카톡이 왔다.

보상지원 서류에 대한 안내와 함께 희생자 이름을 알려주었다.

증조할머니와 함께 ‘박태O’이라는 여자분의 성함이 적혀 있었다.

‘태’ 자는 아버지 형제들의 돌림자이다.

고모도 ‘태’자 이름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여동생인가?

할머니에게는 아버지가 장남이시다.

밑으로 남동생이 있었고 여동생이 둘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4.3 때 남동생도, 여동생 한 명도 굶어 죽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또 한 명의 고모만 살아남았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나에게 그렇게만 알려주셨다.

4.3에 대해 물어보면 아버지는 워낙 먹을 게 없어서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었다는 말씀부터 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동네 형님들이 죽창을 들고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을 찔러댔다고 하셨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빨갱이가 아닌 증거로 빨갱이의 귀를 베어서 갖다 바쳐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야 볼모로 잡힌 가족들을 경찰서에서 빼낼 수 있었다.

그때 열 살이었던 아버지도 엉덩이에 죽창 한 방을 맞았다.




할머니에게 4.3에 대해서 물어보면 낮에는 군인과 경찰이 무서워서 한라산 쪽으로 도망가고 밤에는 공산당이 무서워서 마을로 내려왔다고만 하셨다.

더 이상 자세한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어렸을 때 그 말을 들으면서도 군인과 경찰이 왜 무서웠을까 궁금했다.

군인과 경찰은 반가운 우리 편인데 왜 그들을 피해 다녔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4.3에 대해 물어보면 어머니는 이를 갈듯이 공산당들에 대해 성토하셨다.

외가는 바닷가 마을이었다.

큰외할아버지는 당시에 제주도에서 유일한 목사님이셨다.

교회를 12개나 세우셨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좋은 표적이었다.

그들은 큰외할아버지를 산채로 땅에 묻어버렸다.

그렇게 해서 제주도 출신 첫 목사님께서 돌아가셨다.

지금도 제주도의 여러 교회에 큰외할아버지에 대한 순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니 어머니는 이를 갈면서 공산당을 저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게 모두 1948년에 일어난 일이다.

한국전쟁 2년 전이다.

빨갱이가 뭔지도 잘 몰랐던 무식한 섬사람들에게 닥친 일이다.

국민학교 때 가끔 선생님이 호구조사를 했다.

4월에 제사가 있는 집 손 들라고 했다.

우리 반 거의 전체가 손을 들었다.

신기했다.

나는 손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 집은 기독교를 믿으니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육군사관학교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부모님이 쉬쉬하셨다.

합격할 수 있을까 걱정하셨던 것이다.

내 성적 때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4.3 때 희생된 식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이제야 알았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평생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사셨던 것이다.

증조할머니는 그때 75세이셨는데.

아버지의 여동생은 열 살도 안 되었는데.

두 분은 빨갱이가 아니셨는데.

굶어 죽은 게 아니었는데.

아무도 말을 못 했다.

허망하다.

우리 가족을, 가족의 역사를 송두리째 도둑맞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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