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석 Oct 11. 2020

나이 든 내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흰머리가 너무 많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흰머리가 보이면 한 가닥씩 뽑았었다. 머리숱도 많은데 그깟 몇 가닥 뽑아도 티도 안 난다고 생각했다. 이발을 할 때면 머리숱이 많으니까 많이 솎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물론 요즘은 안 그런다. 내가 보더라도 머리숱이 성성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나이가 드는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한다. 하나도 안 변했다고 한다.

거짓말!

중년 티가 나는데 안 변했다는 게 말이나 되나?

그렇게 보인다면 그들의 눈이 변한 거다. 잘 안 보이는 것이다.


가끔 텔레비전 속에 연예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출연하거나 인터뷰할 때가 있다.

내 나이 또래의 사람이 나오면 엄청 나이 들어 보인다.

그런데 만약 내가 나와도 그와 비슷할 것이다.


지금 이 나이까지 오면서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남겼는지 생각해 보니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주민등록증에 내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것과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내 현재의 나이라는 것만 확실해진다.

나이 들면서 얻은 흔적이라고는 이마에 더 깊어진 주름살 몇 가닥과 무수하게 늘어난 흰머리가 대표적일 것 같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싫어, 주름살을 펴려고 영양제 잔뜩 바르고 마사지를 받고 주사를 맞기도 한다.

그리고 흰색 머리카락은 염색약으로 깨끗하게 처리를 한다. 그러면 젊어 보인다.

젊어지는 게 아니다. 젊어 보일뿐이다.

정작 내 살과 뼈와 피는 원래의 내 나이를 알아채고 나이에 맞는 반응을 한다.

운동감각이 둔해졌고, 눈도 침침해졌으며, 기억력도 깜빡깜빡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어릴 때는 빨리 나이를 먹고 싶었다.

설날 떡국을 먹으면 한 살 많아지니까 아예 두 그릇을 먹으려고도 했다.

그때는 시간이 참 느리게만 갔다.

언제 한 학년 올라가나? 언제 주민등록증을 받을 수 있나? 언제 어른이 되나? 모든 게 까마득해 보였다.

아이였을 때는 분명 어른이 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고 나니 이제 다시 무슨 꿈을 꾸어야 하나 고민이 된다.


나이 많이 먹어서 백발이 성성하고 하얀 도포를 입고 긴 지팡이를 손에 쥔 도사가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다.

오히려 지금 이 상태가 천천히 갔으면 좋겠다.

품에 있는 아이들과 알콩달콩 하는 시간이 더디게만 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의 바람일 뿐.

이 시간은 후딱 지나가고 저 아이들도 곧 커서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갈 것이다.

자기들을 닮은 딸도 낳고 아들도 낳고 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아빠인 내가 아빠도 되고 할아버지도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데 나이 들어가는 나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상상도 힘든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그때는 올 것이다.

만약 그때의 내 모습을 미리 그릴 수만 있다면, 그 그림대로 내가 변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나는 가을 어느 날 바바리코트를 입고. 머리에는 중절모를 쓰고. 테라스가 있는 커피숍 깊숙한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자그마한 에스프레소 커피잔을 기울이고 있겠다.

테이블에는 책 한 권 접혀져 있고 머리 위 스피커에서는 베토벤 교향곡 5번 <전원>이 조용히 흘러갔으면 좋겠다.

조금 있다가 어디선가 할아버지를 부르는 아이들이 달려와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좋아라 하는 풍경이면 더 좋겠다.

그러면 나는 그 아이들 머리에 손을 얹고 조용히 기도해주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공부하자 공부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