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이 성립된다면 어떨까?
지금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세상이 될까?
물론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려고 하다가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가장 간단하게 한 가지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만약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가 되지 않았다면?
그러면 나는 존재할 수조차 없다.
나라고 하는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테니 나를 둘러싼 모든 사회가 없어진다.
내 가정도 없어지고 내 아이들도 없어진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나눈 시간만큼이 사라진다.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세상을 만들어 낼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지금 이 세상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가수 전인권은 <걱정말아요 그대>라는 곡에서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고 노래했다.
이 노래를 배경으로 해서 만든 <응답하라 1988>이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그때 매 회마다 눈물이 났다.
1988년 어간에 내가 느꼈던 사랑과 아픔과 삶에 대한 고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견디기 힘들었던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만약’이라는 가정을 내세웠다.
‘만약 우리 집이 이러지 않았다면’, ‘만약 내가 그러지 않았다면’ 같은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만약’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가수 전인권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의 노래는 ‘만약’이라는 가정을 내세워서 지나간 것을 고치려고 하거나 바꾸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라고 한다.
그러면 지나간 것들 중에서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다.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집을 읽었다.
푸시킨의 시들을 다 읽은 후에 부록으로 나온 작품 해설 부분을 봤는데 웃음이 나왔다.
시집의 번역자인 오정석 씨가 ‘만약’이라는 가정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만약 푸시킨이 다녔던 학교의 교사였다면 푸시킨에게 이러저러한 공부를 시키면서 무엇보다도 사격술을 배우라고 했을 것이라고 했다.
러시아 최고의 시인이 서른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에 결투를 벌이다가 상대방이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 상대방은 자신의 부인 나탈리아와 수상한 행적을 일삼았던 단테스라는 인물이었다.
만약 푸시킨이 사격술을 잘 배웠다면 그 결투에서 푸시킨이 살아남고 단테스가 죽었을 것이다.
그러면 러시아는 최고의 시인을 잃지 않아도 되었을 테고 세상은 푸시킨이 써내는 시들로 더 풍요로워졌을 것이다.
오정석 씨는 그만큼 푸시킨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만약 푸시킨이 살아남고 단테스가 죽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푸시킨이 그 이후로 정말 좋은 시들을 계속 창작해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의처증에 눈이 먼 시인이 되어 부부 사이가 망가지고 가정이 파탄나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었을까?
만약 단테스가 죽는다면 단테스의 집 식구들은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단순하게 푸시킨의 결투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썼을 뿐인데도 그 결과는 러시아 혁명보다 더 큰 혁명으로 번질 수 있다.
이런 생각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죽은 푸시킨을 살리기 위해서 살아 있는 단테스를 죽이지 말자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비록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것도 다 지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푸시킨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법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걱정말아요 그대 https://youtu.be/zZOCgNXU9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