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의 지리산 종주(5)

by 박은석


종주를 할 때면 언제나 찾아오는 생각이 있다.

몸이 고된 순간이면 어김없이 ‘그만할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만큼 왔으면 됐지 않은가? 꼭 정상에 올라가야 하는가?’

힘든 길을 이런 생각과 싸우며 걸어야 한다.

물론 산길을 걷는 것 자체로 충분하다.

하지만 정상의 기쁨은 또 다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등산의 기쁨은 정상을 정복했을 때일 것이다. 그러나 최상의 기쁨은 험준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 있다. 길이 험할수록 가슴이 설렌다.”라고 했다.

그 말에 동의를 해 보려고 해도 동의할 수가 없다.

험준한 산을 기어 올라가는 순간에는 기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단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탁 트인 곳을 만나면 저절로 다리가 후들거리는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철제 계단을 오를 때는 위에 있는 계단만 보려고 한다.

앞만 본다.

아래를 보거나 뒤를 돌아보면 무서움이 올라온다.




장터목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 가는 길은 계속되는 오르막길이다.

1시간에 2㎞씩 걸었던 사람도 이 짧은 1.7㎞를 걷는 데 1시간이 걸린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더 숨이 더 막히고 발걸음이 더 느려지는 구간이다.

탁 트인 공간이 나올 때마다 자꾸 뒤를 돌아본다.

어디서 출발했는지는 보이지도 않는다.

종주 산행은 출발지로 돌아오는 게 아니다.

목적지로 가는 것이다.

이번 종주의 목적지는 출발지점이었던 성삼재가 아니다.

정상인 천왕봉도 아니다.

산 아래 마을인 백무동이다.

그러니 정상인 천왕봉에 올라가느라 힘을 다 써서는 안 된다.

내려갈 수 있는 힘은 남겨놓아야 한다.

중학생 때 한라산 등반 때 경험했다.

올라갈 때는 날 듯이 뛰어갔던 친구가 있었다.

부러웠다.

그런데 내려오는 길에 그 친구가 탈진했다.

그 친구를 업고 내려오면서 느꼈다.

산은 잘 오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내려오는 것은 더 중요하다.




나선형처럼 숲길을 돌고 돌아 서서히 올라간다.

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벗어나니 저 앞에 암벽길이 보인다.

정상에 가까이 다다른 것이다.

돌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정상이 보이는 수간 없던 힘도 생긴다.

발목의 통증도 사라진다.

목의 갈증도 잊어버린다.

핏줄기마다 도파민이 돌아다니는 것 같다.

가슴 벅찬 흥분이 몰려온다.

마지막 한 계단을 오르니 지리산 천왕봉 정상석이 보인다.

“다 왔다!” 예전처럼 “야호!” 외치는 것은 민폐이다.

하지만 가슴 벅찬 감격으로 속에서는 마음껏 외치게 된다.

정상석 옆에 드러누웠다.

대한민국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 드러누워 있다.

보이는 건 하늘밖에 없다.

하늘에 가장 가까운 시간이다.

이 봉우리를 하늘의 왕, ‘천왕봉’이라고 이름 붙이길 잘했다.

대한민국의 기상이 여기서 발원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천왕봉 정상에 오른 모든 이들은 한 식구 같다.

우리는 하나다.




11년 전 천왕봉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지금 찍은 사진을 보았다.

정상석은 그대로인데 나는 많이 달라졌다.

흰머리가 엄청 늘었고 살도 엄청 쪘다.

배도 볼록 나왔다.

그러나 내가 변해도 정상석은 나를 외면하지 않았다.

고맙다.

내가 변했어도 여전히 나를 반겨주는 이가 친구이듯 지리산 천왕봉의 정상석도 나의 친구라 할 수 있겠다.

잠깐 만났다 헤어져도 다시 만나면 반가이 맞아주는 게 친구다.

이제 이 친구를 남겨두고 나는 다시 떠난다.

다시 만나자고 했다.

언제 다시 오게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11년 후에 오게 될지.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랜 후에 오게 될지.

그때까지 안녕이라고 했다.

아마 내가 다시 오면 지금처럼 반가이 맞이해 줄 것이다.

지리산이기 때문에.

친구이기 때문에.

그 길로 무사히 백무동까지 내려왔다.

1박 2일 33시간 동안 37㎞를 걸었다.

그렇게 11년 만의 지리산 종주가 끝이 났다.

2023년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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