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200권 독서운동을 하면서 궁시렁궁시렁

by 박은석


11년 전의 일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2년 넘게 해외에서 살고 있었다.

차츰 외국어가 귀에 편안하게 들리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는데 도리어 우리말이 딱딱하게 굳어져갔다.

상태나 감정을 표현하는 말도 단순화되어 자주 사용하는 몇 단어만 반복되었다.


남들은 몰랐겠지만 나 자신은 마음에 걸림돌이 하나씩 늘어갔다.

‘그래도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는데...’

계속해서 글을 쓰고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 입장인데 문장 실력이 점점 형편없어지고 있었다.

내가 쓴 글을 봐도 마치 외국어 번역 문장을 대하는 것 같았다.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마음의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그래서 일단 아내에게 책을 읽겠다고 했다.

기왕이면 거창하게 1년에 200권을 읽겠다고 했다. 일단은 크게 불러봤다.




주위의 몇 사람에게 조언을 들어보니 많이 읽는 것도 좋지만 깊이 있게 읽는 게 더 좋겠다는 대답이 많았다.

맞는 말씀들이다.

그런데 깊이 있게 읽다가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던 경험이 너무 많았다.

아내는 150권이나 100권으로 목표량을 낮추라고 했다.

그런데 옆에서 누군가 말리면 오기로 더 하고 싶어 진다. 그래서 반드시 200권을 읽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책읽기 고수들이 쓴 책을 살펴봤다.

역시 고수들 중에는 나를 지지해 주는 이들이 많았다.

일단은 많이 읽어보라고, 쉬운 책부터 읽으라고, 분야를 가리지 말고 읽으라고, 책은 지저분하게 읽으라고. 여러 가지 경험담들을 들려주었는데 내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은 색색 볼펜으로 밑줄을 주욱 그었다.

깨끗한 책에 밑줄 그으면 금기의 선을 뛰어넘은 것처럼 왠지 기분이 좋다.




쉬운 책이라고 해도 만화책 같은 것은 싫었다.

중고등학생 때도 만화책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가벼운 자기계발서적부터 읽기 시작했다.

내용이 쉬웠고 동기부여가 되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마구 생겨났다.


그다음 내가 좋아하는 소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소설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을 살아간 사람들을 보여주었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내가 주인공이 되어 그들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었다.

시대를 뛰어넘어 ‘내가 만약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가지다보니 인생을 더 깊고 넓게 볼 수 있었다.

박경리, 박완서, 조정래, 황석영, 파울로 코엘류, 파트리크 쥐스킨트,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책들은 눈에 보이는 족족 읽어갔다.

그들의 책 속에서 나는 그들과 함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였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책에서 얻은 지식들이 조금씩 쌓여갔다.

그와 함께 나의 시선은 이전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음악, 미술, 과학, 경제 쪽으로 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읽어본 내용이 담겨 있어서 낯설지가 않았다.

그리고 어떠한 분야의 책이든지 얽히고설킨 이야기들이 있기에 결국 나의 책읽기는 역사서 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에는 취미가 뭐냐고 물으면 독서라고 했던 적도 있는데 독서는 이제 취미가 아니라 생활의 일부분이 되고 말았다.

200권 읽기 운동의 첫 해에는 목표량 달성을 위해서 일주일에 4권, 한 달에 17권을 목표로 했다. 16권이면 부족하다.

책 읽기를 위해서 TV 시청도,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도 과감히 줄였다.

계단을 오를 때도 읽었고, 화장실에서도 읽었다.

심지어 신호등 앞에 정차했을 때도 책을 꺼냈다.




마침내 첫 해의 마지막 날에 200권을 훌쩍 뛰어넘는 독서기록을 보고 나 자신이 무척 대견스러웠다.

그 이후로 1년 200권 읽기 운동은 1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물론 200권을 못 넘길 때가 더 많았다.

한 두 해는 이제 그만하자는 심정으로 멈추려고도 했었다. 그래도 관성의 법칙인지 적지 않은 책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스마트폰 덕분에 책읽기 운동은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이미 수백 권의 책이 내 스마트폰에 들어와 있다.

이제 나의 책읽기는 종이책이든, 전자책이든, 오디오북이든 가리지 않는다.


책값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책 한 권에서 한 문장만이라도 건진다면 책값 1만5천 원이 전혀 아깝지 않다.

작가는 그 문장을 쓰려고 며칠이나 몸부림을 쳤겠는가?

그리고 모든 책에는 다 배울 점들이 들어 있다.




나의 책읽기는 가족들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간은 절대적인 양이 있기 때문에 내가 책을 읽느라 시간을 쏟으면 그만큼 가족들을 대하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책읽기는 전적으로 가족들의 양보와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앞으로 나의 책읽기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나도 모른다.

많은 사람에게 떠벌렸으니 당분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라고 했던 안중근 의사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이만큼 쓰고 보니 오늘은 아직까지 한 페이지도 읽지 못했다는 생각이 퍼뜩 지나간다.

하루가 바뀌려면 20분 남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또 미친 듯이 책을 읽어야 할 시간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책읽기에 따로 좋은 시간은 없다.

언제나 지금이 딱 좋은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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