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말이었다. 2년 넘게 해외에서 거주하다 보니 현지 언어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을 때는 차에서 내려서 간단하게 말싸움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외국어 어휘가 늘어나는 것과 반비례해서 한국어 어휘가 잊혀갔다. 한때는 국어교사를 꿈꾸며 사범대학 과정을 마쳤던 사람인데 글을 써놓고 보니 평범한 문장, 단순한 단어들만 나열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짤막한 문장 하나로도 심금을 울리는데 왜 나의 글은 이렇게 평이할까 고민이 되었다. 대학시절에 <하얀전쟁>의 작가 안정효 선생의 특강을 들은 적이 있었다. 글을 쓸 때 단어 하나하나가 중요하기에 늘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적어놓는다고 하셨다. 그만큼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배우려고 노력하신다는 말씀이었다.
뭔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일에 바쁘다는 핑계는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그렇게 주위 환경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기가 싫었다. 내 인생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할 수 있는 뭔가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1년에 200권 독서하기였다. 너무 터무니없는 구상이었지만 나 나름대로는 충격을 받은 바가 있었다. 바람의 딸 한비야가 20대 때부터 1년에 100권의 책을 읽는다고 책을 통해서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에는 2만권의 도서가 소장되어 있었다는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이규태선생의 증언도 나를 자극하였다. ‘그 바쁜 분들이 100권을 읽었다면 나 같은 사람은 200권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이 생긴 것이다. 아주 사소한 일이 나에게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다.
물론 주위의 만류가 만만치 않았다. 책 읽는 속도가 엄청 느린 나로서는 시간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1년에 책 200권 읽기 운동한다고 소문을 냈다. 그 소문이 나를 옥죄어서 핑계거리를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일단 컴퓨터 앞에서 딴짓 하던 시간을 줄였다. 텔레비전 시청은 말할 것도 없다. 손이 닿는 곳에는 책을 몇 권씩 두었다. 책 구입 비용이 부담이 되었기에 중고서점과 인터넷 중고사이트도 많이 이용했다. 시대적인 도움을 받아 저렴하게 전자책을 구입하기도 했다. 때맞춰 등장한 스마트폰은 책읽기 운동에 천군만마와 같은 조력자가 되었다. 요즘은 오디오북도 많이 듣는다. <사이언스>의 작가 유발 하라리도 오디오북을 많이 듣는다고 하니 꼭 눈으로 읽어야만 한다고 고집피울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일단 1천권을 읽자고 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1천권을 돌파하고 나니 목적의식을 잃어버렸다. 2~3년 정도는 다시 전처럼 책을 등한시 하게 되었다. 역시 나 같은 사람은 목적을 상실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다시 시작했다. 온 세상이 코로나19 때문에 위축되어 있는 지금 같은 때에는 책읽기로 내공을 쌓는 것이 큰 힘이 되고 있다. 올해는 다른 때보다 훨씬 일찍 200권을 돌파하게 되었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저 작가가 자기 자랑 하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든지간에 내가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책읽기이다. 책 속에서 내가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인생을 볼 수 있었고 역사적 현장으로 들어가 조상들의 애환을 느껴보았다. 예술과 문화를 고양시킬 수 있었으며 현재를 사랑하고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은 나에게 최고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