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딸아이는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간에 집으로 온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학원에 가고 학원 수업이 끝나면 독서실에 갔다가 온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딸아이의 모습이 안쓰럽다. 아비로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으련만. 중3 아들아이는 한참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 인생의 고민들을 하나씩 하고 있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맨날 게임하고 친구들과 노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 나이 때는 그랬다. 부모님이 보시기에는 공부 열심히 하는 괜찮은 아들이었고 선생님이 보시기에는 말썽 피우지 않는 얌전한 학생이었겠지만 나 나름대로 생각이 많았었다. 주위의 시선 때문에 몸으로 실행하지 못했을 뿐이지 머릿속으로는 온갖 일탈을 꿈꿨다.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절반이었다면 이 현실이 조금이라도 무너지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절반이었다.
가끔은 친구들과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서운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 꿈 이야기. 그리고 다가올 미래의 이야기들을. 불안했다. 앞날이 어떻게 펼쳐질지 전혀 몰랐으니까. 무서웠다.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안정적인 환경이 언제 바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바뀌기는 바뀔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이 변하니까. 사람만 변하는 게 아니라 환경도 변하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늙어가실 것이고 누나들은 남자를 만나서 떠나갈 것이었다. 그 후에는? 그리고 또 그 후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생각이 났다. ‘죽음’이라는 말이. 마을 길을 지나가는 꽃상여만 보고도 무서워서 떨었던 나였다. 큰 절 입구에 세워진 사천왕상만 보고도 무서워했던 나였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고소공포증으로 속이 울렁거렸던 나였다. 죽음이 안 무서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게 큰 도움이 안 되었다. 멀찍이서 바라만 보고 계셨던 것 같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벼랑 끝에 데리고 가서 떨어뜨리고서는 혼자 힘으로 날아오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내 두려움은 내가 이겨내야 했다. 내 무서움은 내가 견뎌내야 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내가 맞닥뜨려 싸워야 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내가 이겨내기를, 견뎌내기를, 맞닥뜨려 싸우기를 응원만 하실 뿐이셨다. 내가 아빠가 되고 내 아이들이 커가면서 나도 내 아버지처럼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정한 아비여서 그런 게 아니다. 내가 도와주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딸아이가 자기 혼자서 해야 할 공부이다. 아들아이가 자기 혼자서 풀어야 할 고민거리이다. 어렸을 때는 마냥 해맑았던 아이들이었는데 언젠가부터 입에서 한숨 섞인 소리가 나온다. 인생이 힘들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이다.
미국 시인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의 시가 떠오른다. 마침 제목도 <아들에게 주는 시>이다. 아들에게 꽃길을 선물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담았다. 싯다르타의 아버지처럼 세상의 안 좋은 것은 감추고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 결국 싯다르타가 마주하게 된 것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들이었다. 그렇다면 일찌감치 인생은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고 얘기해 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깊은 밤에 아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내가 그 나이 때에 겪었던 두려움과 무서움을 이야기해 주었다. 다 물리쳤다고는 하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내 앞에 그것들이 서 있으니까. 지금도 앞으로도 그것들을 맞닥뜨리면서 가야 하니까.
아들아, 난 너에게 말하고 싶다.
인생은 내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다는 것을...
계단에는 못도 떨어져 있었고
가시도 있었단다.
그리고 판자에는 구멍이 났지.
바닥엔 양탄자도 깔려 있지 않았단다.
맨바닥이었어.
그러나 난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계단을 올라왔다.
층계참에도 도달하고
모퉁이도 돌고
때로는 전깃불도 없는 캄캄한 곳까지 올라갔지.
그러니 아들아, 너도 돌아서지 말아라.
계단 위에 주저앉지 말아라.
왜냐하면 넌 지금
약간 힘든 것일 뿐이니까.
너도 곧 그걸 알게 될 테니까.
지금 주저앉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얘야!
나도 아직
그 계단을 올라가고 있으니까.
난 아직도 오르고 있단다.
그리고 인생은 내게
수정으로 된 계단이 아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