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1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작은 바닷가 마을 이슬라 네그라가 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잠시 은둔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때 마리오라는 청년이 네루다의 집에 우편배달을 하게 되었다.
마리오는 내세울 만한 집안의 아들도 아니었고 세상을 살아갈 자기만의 어떤 능력을 갖추지도 못했었다.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우편배달부에 지원했고 얼떨결에 합격해서 배달부 일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이었다.
그런 그가 거의 날마다 우편물을 들고 찾아갔던 곳이 바로 네루다의 집이었다.
네루다는 칠레가 낳은 세계적인 시인이지만 그 당시에는 정치적인 탄압을 피해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런 네루다에게 날마다 편지를 배달하면서 마리오는 차츰 그와 친해지게 되었다.
마리오는 네루다를 통해서 시적인 언어들을 배우게 되었고 인생의 여러 모습을 메타포, 비유로 그릴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네루다의 도움으로 마리오는 언어의 넓이와 깊이를 알게 되었고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결혼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칠레의 정치적인 상황이 변하여 네루다도 정계에 진출하였다.
프랑스 대사가 되어 파리로 떠났다.
아쉬운 이별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네루다로부터 소포가 왔다.
그 소포 안에는 편지와 마이크가 달린 녹음기가 들어 있었다.
네루다는 이슬라 네그라의 소리가 그립다며 그곳의 소리를 녹음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이슬라 네그라에 무슨 특별한 소리가 있겠냐마는 마리오는 그 녹음기를 들고 동네방네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소리, 바람 소리, 종소리, 갈매기 소리, 파도 소리 그리고 갓 태어난 마리오의 아기의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네루다에게 보냈다.
그 녹음기를 받은 네루다의 얼굴 표정이 어땠을까?
그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네루다의 얼굴에는 어떤 빛이 흘러갔을까?
문득 스물다섯 살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대학생활 2년을 마치고 남들은 군입대했는데 나는 휴학을 했다.
그리고 복학을 하고 3, 4학년 과정을 마쳤다.
졸업을 했지만 사회에 진출할 수가 없었다.
군복무를 마쳐야 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는데 동갑이었다.
앞날을 자신할 수가 없었다.
내 사랑하는 마음을 계속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군 복무 중에 여자 친구가 다른 사람을 사귄다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5월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다.
장교로 복무하고 싶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장교 지원자가 미달이었는데도 나는 낙방했다.
인생 정말 안 풀린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미안했다.
수많은 남자 중에서 나 같은 사람을 택해서 괜한 고생을 하는 것 같았다.
군입대를 며칠 앞두고 여자친구에게 나의 사랑을 담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마땅한 선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나 자신을 선물로 주고 싶었다.
논산훈련소에 들어가면 들을 수 없는 내 목소리를 주고 싶었다.
내가 평상시에 어떤 생각을 하며 누구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하고 사는지 들려주고 싶었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구입한 aiwa 워크맨에 녹음테이프를 담았다.
하루 종일 워크맨을 들고 다니면서 주절주절, 하고 싶은 말을 다 녹음했다.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 떠는 말들도 녹음했다.
지하철에서든, 길거리에서든, 교회에서든 틈만 나면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녹음한 카세트테이프가 대여섯 개는 되었을 것이다.
논산훈련소에 들어가기 전에 여자친구에게 내 생각이 날 때면 이 테이프들을 들어보라며 건네주었다.
감사하게도 여자친구는 내가 군복무하는 동안 여러 번 그 테이프들을 들었나 보다.
그리고 그 테이프들을 고이 간직하다가 결혼할 때 가지고 왔다.
나의 아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