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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Oct 17. 2020

나는 아버지를 닮았고 아들은 나를 닮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다가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상하다. 

아버지를 닮은 아들은 내가 아니라 동생인 줄만 알았는데 나에게서도 아버지의 얼굴이 나타난다. 


스물일곱 해 전에 세상을 떠나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또렷이 생각이 난다. 

쉰셋.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젊은 나이이셨다. 

이제 내가 그 비슷한 나이만큼 왔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고 싶었다. 

아버지의 인생이 싫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에게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면 괜히 하는 말이라고 여겼다.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버지를 닮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나이가 더해가면서 점점 내 어렸을 적에 바라보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내 얼굴에서 보이는 것이다. 

이제는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버지를 닮았다.




아들과 함께 어디를 가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아들을 보고서는 아빠랑 똑같이 닮았다고 한다. 

그러면 아들과 나는 서로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안 닮은 것 같은데...’ 

이번에도 사람들이 듣기 좋으라고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아내는 아들 때문에 자기가 내 아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숨길 수가 없다고 한다. 

아들과 함께 나서면 사람들이 아들을 보고 “어머! OOO님 부인이세요?”라고 아는 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아예 아들에게 내 이름을 붙여서 “작은 OOO!”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어떤 것이 나를 닮았는지 찾아보았다. 

뭉툭한 코, 짙은 눈썹, 통통한 볼, 약간 도톰한 입술, 돼지털같이 뻗친 머리카락, 큰 발바닥, 들어 올라간 손발톱. 

영락없이 나를 닮았다. 

‘아. 이런 것은 닮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것까지 닮았다.




길에 나서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아들이 중학생쯤 된 경우는 아버지와 키 높이가 비슷하다. 

앞에서야 얼굴을 보면 누가 아버지이고 누가 아들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옷차림새만 봐도 구분이 된다. 

그런데 너무 닮았다. 

목소리도, 억양도,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것도,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도, 심지어 짝다리 짚고 선 모습도 닮았다. 


그렇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서 아버지의 삶을 이어받아 살아간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언젠가 훌쩍 떠나가지만 아들 안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엄마와 딸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를 닮은 아들을, 엄마를 닮은 딸을 원하는 것이리라. 

김동인의 단편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를 보면 그 마음을 진하게 느낄 수 있다. 

발가락이라도 나를 닮기를 원하는 것이다.




아들이 나를 닮았다는 말이 좋으면서도 부담이 된다. 

좋은 모습만 닮는 게 아니라 안 좋은 모습도 닮는다. 

발톱 들어진 것까지 닮았는데 모난 성격과 못된 습관도 닮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내에게 누구 뒷담화라도 할라치면 아들은 딴 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면서도 내 눈치를 보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나 북한에서는 아이들이 부모가 체제에 대해서 불평하는 말을 듣고서 당국에 고발한다는 말도 있다. 

물론 내 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고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들이 있는 데서는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해야 한다.

내가 인생을 불평하면 아들도 인생을 불평할 것 아닌가? 


나는 아들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러려면 인생이 행복하다는 것을 내 삶으로 아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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