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1주일을 앓았다.
그리고 3주간이 넘도록 후유증을 앓고 있다.
나에게는 후유증이 기침으로 왔다.
물론 2주 전보다 지난주가 조금 낫고 지난주보다 이번 주가 조금 더 나아졌다.
아직 다 나았다고 할 단계는 아니다.
큰소리를 내거나 말을 많이 하면 기침이 나온다.
낮에는 괜찮아진 것 같다가도 밤이 되면 콜록콜록거린다.
언제쯤이면 다 낫게 되는지 궁금하다.
어떤 사람은 몇 달 동안 기침을 했다고 한다.
설마 나에게도 그 많은 날이 지나야 기침이 멎는 건 아닌지 살짝 불안하기도 하다.
지난 3년 반 동안 용케도 코로나 바이러스를 잘 피하고 다녔다고 나 자신을 칭찬했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손을 씻으며 조심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남들이 다 멀쩡해질 때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단지 내 순서가 뒤에 있었을 뿐이었다.
회복되는 시간도 나에게 혜택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아서 좋은 점도 있다.
남들이 경험했던 아픔을 나도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코로나에 대해서 내가 할 말이 없었다.
단편 지식이나 얘기할 뿐이었다.
그게 얼마나 아픈지, 얼마나 불편한지, 얼마나 두려운지.
이런 것들은 내가 말할 수가 없었다.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늦게나마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모텔방에서 한 주간 숨어 지내다가 나와 보니 나도 코로나에 대해서 할 말이 생겼다.
더군다나 이렇게 길게 후유증까지 앓고 있으니 코로나를 주제로 하는 대화에 나도 당당히 낄 수 있게 되었다.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까지 생각하냐고 하겠지만 사람들은 사소한 경험 때문에 동질감을 느낀다.
생판 모르는 남자들이어도 군대 얘기만 하면 곧 친구가 된다.
공통의 경험이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친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는 우리에게 공통의 경험을 준 것이다.
경험이 있으면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다른 사람과 나 사이를 줄이게 된다.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곳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이야깃거리를 찾는다.
어린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정신이 쏙 빠진다.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어르신들도 이야기를 찾는다.
누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란다.
하다못해 전화기가 울리기를 바라기도 한다.
나에게 누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야 할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인생을 배우게 되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생을 가르쳐준다.
우리 인생은 모두 이야기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 등 걸출한 작품을 쓴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만 글로 쓴다고 했다.
전쟁터에서의 경험이 전쟁 소설을 쓰게 되었고 사랑과 이별을 겪은 경험이 사랑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쿠바 바닷가에서 낚시를 했던 경험이 산티아고 영감을 주인공으로 한 <노인과 바다>를 탄생시켰다.
헤밍웨이만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쌩 덱쥐 페리는 비행기 조종사로 지냈던 경험으로 <야간비행>을 썼고 별에서 온 <어린 왕자>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박완서 선생은 자신이 직접 경험했던 일들을 하나씩 끄집어내어 193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의 대한민국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이제 나도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감사하게도 브런치라는 도구가 있어서 나의 이야기를 편안하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