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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Nov 14. 2023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없다


흐르는 냇물을 보면서 저 냇물이 어제 내가 보았던 냇물이라고 말한다면 뭘 몰라도 단단히 모르는 사람이다.

어제 보았던 냇물은 이미 어제 떠내려가 버렸다.

오늘 보는 냇물은 어제의 냇물이 아니라 오늘의 냇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눈에 보이는 냇물은 모두 다 새로운 냇물이다.

보는 순간 흘러가 버리기 때문에 “이 냇물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다른 냇물이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간도 흐르는 냇물과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매일 낮 열두 시에 시계탑에서 종이 울린다고 해서 그 시간이 항상 같은 시간은 아니다.

어제의 낮 열두 시와 오늘의 낮 열두 시는 엄연히 다른 시간이다.

어제의 시간은 이미 지나버렸고 오늘의 시간도 순식간에 지나버린다.

그 변하는 시간을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항상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눈이 착시 현상을 겪는 것이고 우리 생각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냇물도 흐르는 속도대로 변하고 시간도 흐르는 속도대로 변한다.

우리 눈에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변한다.

천년만년 그 자리를 지킬 것 같았던 바위도 천년만년 지나면서 쪼개지고 부서지고 무너진다.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만세 만세 만만세!”의 소리를 들었던 황제들도 100년 안에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영원무궁하리라고 칭송했던 나라들도 1000년을 버틸동말동 하다가 사라지고 말았다.

“아! 신라의 밤이여” 노래를 불렀던 신라도 천년이 지난 후엔 온데간데없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자랑하며 개선식을 치렀던 로마도 천년 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개선식에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외쳤던 것처럼 로마도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나라들이 들어섰다.

인류 역사에 영원한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500년 전에는 명나라의 문화가 최고인 줄 알았다.

정화의 원정대가 수많은 나라들을 둘러보았는데 명나라만큼 발전된 나라를 보지 못했었다.

200년 전에는 서구 문화가 제일인 줄 알았다.

총과 대포로 무장한 서구의 군대는 아메리카를 차지하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차곡차곡 점령하며 각자 자기 나라를 제국이라고 불렀다.

100년 전에는 그 서구의 문화를 일찌감치 받아들인 일본의 문화가 동양에서는 가장 앞선 문화인 줄 알았다.

일본이 동양을 개조해야 한다고 했을 때 무식한 우리 백성들 중의 일부분은 고맙다며 두 손 들고 환영했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르면서 서구 문화가 과연 앞선 문화였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아시아를 전쟁의 쑥대밭으로 만든 일본을 보면서 과연 일본 문화가 앞선 문화였냐고 따져 묻게 되었다.

서구나 일본이나 모두 다 흐르는 냇물이었다.

잠깐 눈앞에 보이다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20세기 중반에는 미국과 소련이 절대강자인 줄 알았다.

미국 편에 들든지 소련 편에 들든지 해야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양쪽 아무 편에 들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었다.

영원한 강자도 없었고 영원한 약자도 없었다.

영원히 군림하는 문화도 없었고 영원히 주눅 들린 문화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높은 산도 낮아지고 낮은 산도 높아진다.

강한 문화가 약해지고 약한 문화가 어느덧 강해질 수도 있다.

지금 뭔가 조금 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은 아니다.

언제 그것이 나에게서 사라질지 모른다.

지금 뭔가 조금 없다고 해서 주눅 들 것도 아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무엇인가가 생길 수 있다.

지금은 내가 강자일지 모르지만 내일에는 내가 약자일 수 있다.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내가 약하지만 내일은 내가 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주눅 들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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