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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Nov 29. 2023

책 읽기가 중독이 될 수 있다


넷플릭스 영화나 한 편 볼까 하다가도 10분을 넘기는 일이 드물어졌다.

눈을 사로잡는 영상의 힘이 마음을 사로잡는 책의 힘을 따라오지 못한다.

영상은 만든 이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만 내가 볼 수 있다.

하지만 책은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이상을 내가 볼 수 있다.

가령 박완서 선생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을 읽는다고 치자.

그 책은 박완서 선생의 청춘 시절을 그린 책이다.

1930년대 말에서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가 시대적인 배경이다.

그런데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1970년대 이후의 시대를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시대이다.

아무리 내가 1930년대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다 하더라도 책을 읽다 보면 1970년대의 그림을 그린다.

책 속에 나오는 어머니는 내 어머니로 그려지고 책 속에 나오는 친구는 내 친구로 그려진다.

작가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이다.




2시간 동안 영화 한 편을 보면 영화 한 편으로 끝난다.

하지만 2시간 동안 책 한 권을 읽으면 비록 내 손에 들고 읽은 것은 책 한 권이지만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책은 여러 권이 된다.

책을 읽는 시간은 어떻게 보면 마술 같은 일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그래서일까? 역사에 한 줄 획을 그은 인물들 중에는 책 읽기를 권했던 이들이 많이 있다.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는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자녀들에게 쓴 편지를 모아서 <아버지의 편지>라는 책을 펴냈다.

몇 년 전에 읽었는데 책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다산이 강조했던 한 가지는 분명히 기억한다.

세상을 탓하지 말고 부지런히 책을 읽고 공부하라는 말이었다.

안중근 의사는 죽음을 앞둔 시점까지도 책을 읽고 글을 썼다고 한다.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는 말은 괜히 폼잡는 말이 아니다.

당신께서 직접 실천하신 말이었다.




매일 한 편의 글을 브런치에 올리겠다고 작심을 했는데 3년이 지나니까 솔직히 게을러졌다.

그날그날 떠오르는 주제로 A4용지 한 장 분량의 칼럼을 써왔는데 무슨 글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날도 생겨났다.

1천 편 이상의 칼럼을 썼으니까 글의 소재가 떨어질 만도 했다.

글감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그래도 글이 안 써지는 날들이 생겼다.

특히나 올해는 논문도 한 편 써야 했다.

그리 대단한 과정의 공부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왕에 시작한 공부니까 끝을 맺어야 했다.

졸작이지만 어쨌든 논문을 마무리 지었다.

심사 과정만 남아 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브런치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씩 달래었다.

최근에 부쩍 글 쓰는 날이 줄어들어서인지 글 쓰기가 어색해지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책 읽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이제 완전히 습관이 된 것인지 틈만 나면 책을 보고 듣는다.




지난 1월의 생각으로는 이번 해에는 책 읽기가 수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에너지를 다른 데로 많이 돌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올해가 책 읽기의 탄력을 가장 많이 받은 해가 되었다.

덕분에 책 속에서 다양한 세상을 만나고 있다.

엊그제는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는데 이게 또 신기한 만남이었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서는 화성의 여인을 그려볼 수 있었다.

먼 미래에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파우스트>에서는 괴테가 살았던 1800년대의 사람들을 그려볼 수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이다.

21세기의 분당이라는 도시에 살면서 옛날 사람들도 만나고 미래 사람들도 만나고 있다.

책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기 시작하면 곧 중독될 수도 있다.

그런데 몸과 마음을 망치는 나쁜 중독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선한 중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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