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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Dec 13. 2023

미끄러지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도로에 차들이 빼곡했다.

안 밀리면 20분 거리인데 내비게이션을 보니 1시간 넘게 걸릴 거라고 했다.

브레이크와 액셀레이터를 번갈아 밟느라 오른쪽 발목이 뻐근해졌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기로 했다.

천천히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20분 정도 갔다.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앞으로 쏠렸다.

너무나 소리가 컸다.

‘이게 뭐지?’ 했는데 내 차가 앞차와 딱 붙어 있었다.

내가 앞차를 들이받았다! 이해가 안 되었다.

내가 졸았나?

분명 방금 전까지 맨 정신이었는데?

졸았나 보다.

그 시간이 1초나 되었을까?

그 깜빡하는 사이에 내 차가 앞차와 붙어버렸다.

차에서 내려 앞차 운전자에게 미안하다고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다른 차들에게 폐를 끼칠 수 있으니 일단 차를 이동시키고 보험사에 연락하기로 했다.

100프로 나의 잘못이니까 왈가왈부할 게 없었다.

많이 놀랐을 텐데 앞차 운전자가 굉장히 차분했다.




다시 운전대를 잡고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지난 30년 동안 이렇다 할 교통사고가 없었다.

초보 운전 때 길옆에 정차해 있던 자동차의 백미러에 살짝 긁힌 적이 2번 있다.

그 당시에는 그 정도는 사고로 치지도 않았다.

오늘처럼 앞차 범퍼에 살짝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나곤 했다.

언젠가 주차하다가 뒷차와 부딪친 적이 있는데 뒷차의 번호판이 찌그러졌다며 그거 고치는 비용으로 4만 원 지불했던 적이 있기도 하다.

이 정도였으니까 나는 교통사고를 낸 적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운전병으로 군복무를 했는데 그때 운전대를 잡을 때마다 외쳤던 말이 있다.

“안전운전, 방어운전”이다.

지금까지 그렇게 운전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졸음운전을 한 적도 거의 없었다.

손에 꼽을 정도였다.

졸음운전을 했을 때도 주변의 차량과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교통사고는 나와는 거리가 먼 줄 알았다.

계속 그럴 줄 알았다.




그랬던 내가 오늘 교통사고를 낸 것이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차 안에서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나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굉장히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나에게는 큰 불행이 피해 가는 줄 알았다.

어떤 일을 할 때도 남들이 잘 못하는 모습을 보면 ‘저걸 왜 못 할까?’ 의아해하였다.

척 보면 척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이 실수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저걸 왜 실수할까?’ 생각했다.

나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자동차 사고를 내고 보니 ‘나라는 인간도 별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잘해서 사고가 안 난 게 아니다.

내가 능력이 좋아서 일처리가 잘 되었던 게 아니다.

내가 꼼꼼해서 실수가 없었던 게 아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그때 마침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던 것이다.




불현듯 행운이 찾아온 것처럼 불행도 불현듯 찾아온다.

오늘 같은 경우가 그렇다.

불현듯 졸음이 찾아왔고 불현듯 내 다리에 힘이 풀렸고 불현듯 내 차가 앞차를 들이받았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것 같다.

실수도 많아지고 사고도 많아질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꼭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 같다.

조심조심 걸어가지만 미끄러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린아이도 미끄러지고 십 대의 청소년도 미끄러지고 이삼십 대의 청년도 미끄러지고 사오십 대도 미끄러진다.

인생 경험이 많은 육칠십 대도, 팔구십 대도 미끄러진다.

미끄러지지 않고 살얼음판을 건널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까지 미끄러지지 않았다고 해서 자랑할 것도 아니고 여러 번 미끄러졌다고 해서 주눅 들 것도 아니다.

얼음판에서는 미끄러져야 제맛이다.

미끄러지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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