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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루지 때문에 이 생각 저 생각 한다

by 박은석


손과 다리에 뾰루지 같은 게 자꾸 돋아난다.

몇 년 전부터 나타나는 증상이다.

연고를 바르면 가라앉았다가 며칠 지나면 또 나온다.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돋아난다.

지금도 한 열 개 정도 있다.

처음에는 나에게 무슨 병이 생겼나 걱정했다.

피부과에 갔더니 대수롭지 않게 처방해 줬다.

그 처방이라는 것도 달랑 연고 하나 주는 것이다.

물론 환부가 넓었을 때는 주사 한 방 놓기도 했다.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냐고 물었더니 특별한 이유는 없고 몸이 노화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피부가 건조해지는데 그때 이런 녀석들이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딱히 처방이라는 게 없었다.

물 많이 마시고, 운동 잘 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보습제 잘 바르라는 것 정도였다.

잘 먹고 잘 살라는 말로 들렸다.

근데 그게 쉬울 듯하면서도 쉽지 않다.

잘 먹는다고 해서 잘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픈 통증도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통증 못지않게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게 가려움이 아닐까 싶다.

내 몸에 돋아난 뾰루지들이 나를 가렵게 한다.

잊을 만하면 가려움증이 “나 여기 있소”라며 나를 부르는 것 같다.

의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현대인에게 나타나는 증세이고 지구 환경이 무너져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공기의 질이 나빠지고 온갖 매연과 미세먼지가 내 몸을 몇 겹으로 휘감고 있기 때문에 이런 뾰루지 같은 증세가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이것도 어쩌면 현대인의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의 끝에는 옛날에는 이런 질병이 없었을 것이라고 믿어 버린다.

그러면 갑자기 옛날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뾰루지 때문에 고생하는 일도 없었을 테니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철저한 내 착각이다.




옛날 사람들은 내가 겪는 뾰루지를 겪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떻게 단정 지을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옛 문헌에서 뾰루지 같은 것 때문에 고생했다는 내용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기록이 없다고 해서 뾰루지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일상화된 일은 어지간해서는 기록에 남지 않는다.

가령 하루에 밥을 세끼 먹는다거나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한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길만한 일도 아니다.

일상적인 내용은 그저 그러려니 무시하고 넘어간다.

웬만해서는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

지필묵이 비쌌던 시대인데 그런 시시콜콜한 일들을 기록하느라 지필묵을 소모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에서 뾰루지 같은 게 너무나 흔한 질환이었다면 그것을 알리느라 호들갑을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몸으로 때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도 뾰루지 때문에 엄청 고생했을 것이다.




그 똑똑한 세종대왕도 종기 때문에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정조대왕은 종기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오늘날 같으면 피부과에 가서 간단한 시술만 했어도 나았을 것이다.

별 대단치도 않은 질병 때문에 임금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랬다면 옛날 사람들에게 그 질병은 별 대단치도 않은 질병이 아니라 무척 무서운 질병이었을 것이다.

서민들은 그야말로 그런 질병이 자신을 피해 가기만을 빌었을 것이다.

그분들에 비하면 나는 참 행복한 사나이다.

뾰루지가 나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지 좀 가렵고 불편할 뿐이다.

많이 가려우면 연고를 바르면 되고, 그것도 안 통할 때는 피부과에 가서 주사 한 방 맞으면 된다.

좋은 시절에 태어난 복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도 나이는 들어간다.

몸이 노화된다.

뾰루지가 생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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