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인 아들이 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밤 10시에 시작하는 영화다.
그 늦은 시간에 남자애 둘이서 무슨 영화를 보려고 그러나 했더니 <서울의 봄>을 본다고 했다.
요즘 제일 핫한 영화다.
나는 안 봤다.
‘서울의 봄’이라는 제목을 대했을 때부터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심한 불편함이 있었다.
그 불편한 마음에는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고 눈물도 있고 미안함도 있고 고마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분노도 있다.
매우 복잡한 심경이 얽혀 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봄이 되면 생각이 나고 5월이 되면 더 또렷해진다.
봄 햇살 따사로울 때가 되면 그 생각이 난다.
계절은 봄이 되는데 서울에는 봄이 왔을까?
우리 사회에는 봄이 왔을까?
봄은 어떤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사회의식이 깊은 사람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 시대를 잊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이런 감정과는 달리 아들은 요즘 인기 있는 영화라니까 자기도 한번 보려고 했을 거다.
친구들도 많이 봤다니까 친구들과의 공통사를 가지고 싶었을 거다.
영화를 보다가 졸지는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아들을 향한 걱정도 생겼다.
한창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아들이 1980년 봄의 그 아픔을 알게 되면 어떻게 변할까?
자기 자식에게 안 좋은 모습은 감추고 싶은 게 부모의 심정이다.
석가의 부모도 어린 석가에게 궁궐 밖의 비참한 인간사를 보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했다고 전해진다.
나도 가능하면 아이들에게 안 좋은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으려고 했다.
자기들이 커가면서 차차 알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안경으로 들여다보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알고 느끼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나의 견해일 뿐이다.
1979년에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은 초등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국민학교와 초등학교의 차이는 단순히 단어 하나의 차이가 아니다.
국민학교라는 말에는 일제 식민통치와의 끈이 연결되어 있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꽤 시간이 지날 때까지도 우리는 그 끈을 완전히 끊지 못하였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끊어야 할 것과 끊지 말아야 할 것을 분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의 일도 그 연장선에 있었을 것이다.
여덟 살 어린아이였던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집안이나 동네의 심각한 일이 있을 때는 부모님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있긴 했다.
그럴 때면 이불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 이야기들을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부모님도 아무 소리를 안 하셨다.
세상 한 편에서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우리 부모님도 전혀 모르셨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에 중학생이 되었고 80년대 말에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사춘기 시절의 절정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도 갈피를 잡지 못하였지만 우리 사회도 그랬던 것 같다.
교회에서도 우울한 찬송이 불렸다.
통기타를 치던 선배들은 단조 풍의 애절한 노래들을 즐겨 불렀다.
민중찬송가라고 했다.
양희은의 ‘아침이슬’과 ‘상록수’를 그때 알았다.
작곡가 김민기 씨의 노래를 배웠고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북한강에서’와 ‘저기 떠나가는 배’를 부를 때쯤에 노찾사의 노래들이 나왔고 김광석을 알게 되었다.
대학입학이라는 기쁨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대학 신입생 생활은 짙은 최루탄 냄새로 얼룩이 지고 말았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그들의 꿈과 바람은 모두 ‘서울의 봄’이었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다시 서울의 봄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발 내 아이들은 서울의 봄을 만끽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