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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Dec 25. 2023

크리스마스를 돌려주세요


방금 자정이 지났다.

크리스마스가 시작되었다.

내 어릴 때 이 시간이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새벽송이 울려 퍼졌다.

나도 그 새벽성가대에 합류하려고 졸린 눈을 비비면서 깨어 있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떤 해는 11시 30분 정도까지도 분명히 깨어 있었는데 눈을 떠 보니 날이 밝았던 때도 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깜깜한 밤길을 걸어갈 때면 하늘에서 별똥별이 쌩하니 떨어지기도 했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면서 마음에 작은 소원도 하나씩 새겨보기도 했다.

아버지는 시골 사람치고는 꽤 낭만적이셨다.

크리스마스 한 달 전부터 반짝이와 깜빡이 불로 마루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셨다.

한밤중에 불빛이 반짝이는 집이 바로 우리 집이었다.

새벽성가대가 우리 집에 들를 때면 어머니는 팥죽을 쒀서 그들을 대접했다.

지금도 그 풍경이 생생하다.




서울로 올라왔더니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에도 갈 데가 없어졌다.

밤 열두 시를 기다려서 새벽송을 출발하는 교회도 없었다.

어쩌다가 학생들 몇몇이 새벽송을 갔는데 새벽에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하느냐는 민원이 폭주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마스의 밤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노래를 부를 일도 없어졌다.

밤 열두 시까지 안간힘을 쓰며 잠을 안 자고 버틸 필요도 없어졌다.

차라리 다음 날을 위해서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 되었다.

하늘에서 눈이 펑펑 쏟아져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그 눈길을 헤치며 찾아갈 집들도 없어졌다.

오히려 눈길이 더 불편하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식구들과 조용히 지내는 날이 되고 말았다.

날은 똑같은 12월 25일인데 도시의 크리스마스는 시골의 크리스마스와 달랐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모습도 달랐다.




내 어릴 적 크리스마스는 동네 잔칫날이기도 했다.

한 달 전부터 교회학교에서는 크리스마스 공연 준비를 했다.

독창, 중창, 합창, 연극, 율동 등의 공연이 펼쳐졌다.

학교에서는 치르는 학예발표회보다 교회에서 선보이는 크리스마스 공연이 훨씬 재미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밤에 펼쳐지는 성탄 발표회를 보려고 동네 사람들이 빼곡하게 예배당에 들어오기도 했다.

신발 잃어버릴 수 있으니 봉다리에 잘 챙겨서 들어오라는 안내 방송도 했다.

한두 시간 이어진 공연을 보면서 웃기도 하고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든 안 다니는 사람이든 크리스마스는 잔칫날이었다.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물감을 입힌 후에 메리 크리스마스 글자를 썼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고, 그 카드를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크리스마스 카드를 받기도 했다.

주는 기쁨과 받는 기쁨이 넘치는 날이 크리스마스였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아무에게도 카드 한 장 보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공연을 보기는 했지만 어릴 적 그 감흥과는 사뭇 달랐다.

물론 새벽송도 없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도 보이지 않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지만 크리스마스다운 느낌이 들지 않는다.

1년 365일 중의 하루 같은 기분이다.

도시에 살아서 그런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아니면 감정이 메말라서 그런가?

1년을 꼬박 기다리던 그날이 그립다.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크리스마스가 몇 밤 남았는지 헤아리던 그 시절이 보고 싶다.

새까만 밤에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노래를 부르면서 밤길을 걸어가고 싶다.

새벽송을 부르면 어서 들어오라며 간식 보따리를 풀어놓던 어머니들이 보고 싶다.

밤길 걷다가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싶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면서 조용히 소원 하나 빌어보고 싶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를 돌려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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