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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Jan 11. 2024

내 인생의 그림을 그린다


잔잔했던 연못에 잉어 한 마리가 지나가자 물결이 일었다.

물결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빨간 잉어의 꼬리지느러미가 한 필의 붓이 되어 물 위에 그림을 그렸다.

잉어가 가는 길을 따라 그림의 폭이 넓어졌다.

그림은 사람만 그리는 줄 알았다.

그림이라고 하면 종이에 물감을 칠하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런데 종이가 아니더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돌판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땅바닥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나뭇잎에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붓에 물감을 칠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연필로도 그릴 수 있고 모래를 뿌리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돌을 깎아서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흙을 붙이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재료가 없어서 그림을 그릴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은 뭘 잘 모르는 사람이다.

재료는 무궁무진하다.

우리는 우리만의 재료로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어린아이처럼 그림 그리는 것이 즐거운 놀이가 되기도 하지만 입학시험을 앞둔 수험생처럼 그림 그리는 것이 부담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싶은 그림도 있고 아무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그림도 있다.

절대로 그림을 안 그리겠다며 붓을 꺾는다고 해도 우리는 저마다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며 산다.

어떤 사람은 말로 그림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글로 그림을 그린다.

말 한마디가 한 폭의 그림이 되고 글 한 문장이 한 장의 그림이 된다.

말을 좋게 하면 좋은 그림이 한 편 나오고 말을 험하게 하면 험한 그림이 한 편 나온다.

글을 아름답게 쓰면 아름다운 그림이 나오고 글을 지저분하게 쓰면 지저분한 그림이 나온다.

금칠을 한다고 해도 지저분한 그림이 될 수 있고 흙칠을 한다고 해도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다.

재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모두 그림을 그리며 산다.

화가의 직업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평생 그림을 그린다.

종이와 붓과 물감이 없어도 우리는 모두 그림을 그린다.

말로 그리고 글로 그리고 삶으로 그린다.

빨간 잉어가 헤엄을 치면서 연못에 그림을 그리듯이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그림을 그린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가 그림이 된다.

우리가 살아낸 시간이 그림이 된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다.

지나간 날은 수없이 많은 그림으로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 당시에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힘들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 우리는 몇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눈물과 한숨이 물감이 되었고 기쁨과 희망이 물감이 되었다.

하루에 한 줄씩 붓칠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모이고 모여서 선이 되었고 면이 되었고 그림이 되었다.

인생작품이 되었다.




새해가 되어 새 도화지를 받은 기분이다.

데생을 하듯이 벌써 살짝 그렸다가 지웠다.

2024년에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생각 중이다.

시대적인 배경은 그리 밝지 않다.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하지만 내 마음에서 밝은 기운이 나오기도 한다.

희망찬 느낌이 솟아난다.

이 두 감정 사이에서 나는 나만의 그림을 그려갈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 말을 하면서 그림을 그릴 것이며 밤에 조용히 모니터를 보며 글을 쓰면서 그림을 그릴 것이다.

무엇보다도 올 한 해 동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서 나의 그림을 그릴 것이다.

좋은 그림이 아니어도 괜찮다.

명작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 그림을 통해서 나를 볼 수 있으면 훌륭한 그림이 될 것이다.

학창시절 내내 미술은 아름다울 ‘미’ 자라는 점수를 받았다.

수우미양가 중에서 ‘미’ 정도면 괜찮은 점수였다.

그리고 이제 내 인생의 미술을 대하고 있다.

이것도 아름다울 ‘미’ 자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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