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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Jan 29. 2024

나에게는 오지 않을 날인 줄 알았다


내가 기억하는 내 시력은 언제나 1.5에서 2.0 사이에 있었다.

내 시력은 1.0 밑으로 떨어지지 않을 줄 알았다.

안경을 착용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안경을 쓴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나이가 들면 눈이 침침해진다고 하던데 나에게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날 줄 알았다.

시력 좋은 게 나의 장점이었다.

작년에 아는 분이 운영하는 안경점에 잠깐 들렀다.

시험 삼아 시력 테스트를 받았는데 나한테 노안이 왔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안경점 사장님이 도수가 있는 렌즈를 내 눈에 끼워주면서 어떠냐고 물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갑자기 세상이 환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노안을 인식하지 못했던 이유는 가까이 있는 글씨가 그래도 잘 보였기 때문이다.

내 눈이 노안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책을 보는데 글씨가 흐릿해 보이는 것 같다.

나에게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이 왔다.




내 아버지의 머리숱은 많았고 색깔은 까맸다.

어머니도 머리숱은 많았지만 가끔 흰머리를 뽑아달라고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흰머리를 본 기억은 없다.

나도 아버지를 닮아서 흰머리가 안 날 줄 알았다.

하얀색 새치머리가 나는 친구들을 보면 신기했다.

내 머리칼은 늘 검을 줄 알았다.

15년쯤 전부터 흰머리가 하나씩 생겼다.

어디 감히 내 머리에 흰머리카락이 자리를 잡았느냐며 곧바로 뽑아버렸다.

그때는 그게 가능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흰머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제는 뽑아버렸다가는 머리가 휑하니 비어버릴 것 같다.

흰머리가 늘어나는 것과 비례해서 머리숱이 줄어들었다.

전에는 미용사에게 머리를 많이 솎아내 달라고 했다.

머리숱이 많아서 귀찮다고 했다.

이제는 그런 말을 안 한다.

머리카락을 솎아내면 안 되는 상태가 되었다.

나에게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이 왔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하루에 한 편의 글은 올릴 수 있을 줄 알았다.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를 인용하면서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었다.

그래도 그치지 않을 줄 알았다.

밤 열두 시 이전에 글을 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던 적이 있었다.

열두 시 지나서 글을 올릴 때는 마음이 괴로웠다.

만 3년은 잘 견뎠다.

천 일의 글쓰기였고 천 편의 글이 탄생했다.

이제 하루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은 완전히 습관으로 굳어진 것 같았다.

어쩌다가 글쓰기를 하루 빼먹은 날이 있었다.

너무 속이 상했다.

코로나 확진으로 몸 고생을 하면서, 독감으로 몸 고생을 하면서 글 쓰기를 빼먹는 게 익숙해졌다.

내가 글을 안 쓰더라도 세상은 아무 이상이 없이 잘 돌아갔다.

하루에 한 편의 글을 쓰는 습관이 무너졌다.

오히려 글 안 쓰는 습관이 든 것 같다.

나에게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런 날이 오고 말았다.




나에게 있는 장점이 더 이상 장점이 되지 않을 날이 온다.

탁월했던 재능들도 언젠가 녹슬어버리는 날이 온다.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일들일지라도 언젠가는 멈추는 날이 있다.

영원한 우정, endless love를 약속했어도 그 약속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을 때가 있다.

우리가 변하기 때문이다.

사는 동네를 떠나면서 변하고, 나이가 들면서 변하고, 일을 하면서 변한다.

‘나는 절대로 저런 사람은 되지 않을 거야.’라며 다짐하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런 때가 되면 우리는 “내가 이럴 줄 몰랐다”는 말을 내뱉게 될 것이다.

약해지는 날도 오고 아픈 날도 오고 이별의 날도 온다.

나에게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나에게 올 날이다.

그런 날이 왔을 때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자괴감에 빠져들지 말아야 한다.

우울해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스럽게 그런 날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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