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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Feb 06. 2024

잊힐 줄 알았지만 잊히지 않는 것, 고향


강원도 춘천에 있는 소양강댐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댐 위에 난 길을 따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걸어가면서 산과 물에 취하고 인간의 위대한 업적에 취했다.

저쪽 끝에 다다르니 순직위령탑이 있었다.

1973년 10월 15일에 세운 탑이었다.

내용을 보니 소양강댐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있었다.

무려 29억 톤의 물을 담을 수 있는 댐이었고 6년 6개월 동안 617만 명이 동원되어 엄청난 공사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댐을 건설하다가 37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분들의 희생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탑을 세운다고 적혀 있었다.

뭔가 묵직한 것이 내 가슴을 내려갔다.

정말 순직한 분들을 기리는 탑이라면 그분들의 이름이라도 적어두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37명의 이름이니까 그리 많은 분량도 아니고 지금 위령탑 비문에서 네 줄 정도만 추가하면 될 것 같았다.

아쉬웠다.



위령탑을 지나 오르막길을 조금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전에는 팔각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망향비(望鄕碑)’가 세워져 있다.

지금은 물에 잠긴 그곳, 소양호 밑바닥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비석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비석.

소양강댐을 건설하면서 3개 시군 6개 면 38개 리에 걸쳐 약 4천6백 세대의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집을 두고 새로운 곳으로 이주해야 했다.

1967년에서 1973년 사이였다면 정부에서 그들에게 제대로 보상을 해줬을 것 같지도 않다.

물론 보상금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돈으로 집을 살 수는 있었어도 이웃을 사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고향산천을 사지는 못했을 것이다.

떠나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야 했다.

집도 밭도 모두 남긴 채 그들은 새로운 터전으로 떠나야만 했다.

새로운 곳에 정착하면서 고향을 잊었을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그들을 ‘수몰 이주민’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 단어조차도 마음에 안 든다.

집 떠날 때 어린아이였던 이들은 지금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 되었을 것이다.

가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노래가 흘러나올 것이다.

고향 생각에, 부모님 생각에, 어릴 적 함께 뛰놀던 친구 생각에 단숨에 소양강댐으로 달려올 것이다.

설날이나 추석이 되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때 높게 보았던 산들은 그대로 있다.

그런데 고향이 안 보인다.

고향이 바로 발밑에 있지만 물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에 성묘를 못한 지 50년이 넘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발만 동동 구를 것이다.

고향을 가슴에 묻고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고향은 사라진 것일까?

절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 밑에 고향 마을이 고스란히 남아 있듯이 그들의 마음속에도 고향 마을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미국 작가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은 댐 건설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복숭아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최고의 복숭아를 수확하는 비결을 알고 있었다.

17살의 빅토리아에게 운명처럼 사랑이 찾아온다.

그리고 비극도 찾아온다.

생명의 씨앗도 찾아온다.

사랑하는 이가 목숨을 잃었다.

새로운 생명은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감당할 수 없었다.

어느 여행객의 자동차에 아기를 두고 도망친다.

얼마 뒤 댐 건설이 시작된다.

빅토리아는 마을에서 제일 먼저 땅을 팔고 이주한다.

마을이 물에 잠기면 다 잊힐 줄 알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짧은 추억도, 팔딱거리던 어린 생명에 대한 기억도 다 잊힐 줄 알았다.

하지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흐르는 강물처럼 살기가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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