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성경이야기 2

by 박은석


구약성경의 첫 다섯 책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 5경’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가 기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론 신명기 마지막 장인 34장에는 모세가 죽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신명기가 과연 모세가 기록한 책이냐는 논란이 있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된다.

처음에는 모세가 기록했는데 후에 전해지는 과정에서 원본은 없어졌고 베껴 쓴 복사본만 남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복사본의 끝에 주석 비슷하게 부연 설명이 덧붙여졌는데 그 덧붙인 부분까지를 성경 정경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을 읽다 보면 후대에 덧붙이거나 빼먹은 부분들을 가끔씩 만나게 된다.

이게 다 베껴 쓴 사본들이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아주 고집스러운 교파에서는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은 절대로 오류가 없다는 견해를 펼친다.

그런 사람들과는 말싸움할 필요가 없다.




모세는 기원전 1,500년경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본다.

참고로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경이고 다윗은 기원전 1,000년 경의 인물이다.

우리 한민족의 조상인 단군이 기원전 2333년에 나라를 세웠다고 했으니까 아브라함은 대략 단군 시대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까마득한 옛날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했다고 하니까 결국 모세는 자기보다 500년 이전에 살았던 조상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서기 2,000년대를 살고 있는 내가 1592년에 있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하지만 하나이 불러주는 대로 받아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인간이 자신의 말과 문화를 바탕으로 해서 기록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읽으면서 그 시대의 문화를 찾아보는 것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기쁨이 된다.




문화를 이해하려면 그 범위가 굉장히 넓어서 엄두가 안 난다.

하지만 가장 쉬운 것부터 접근해 보면 의외로 쉽다.

문화는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에 그 흔적을 남긴다.

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중심지인 광화문 앞쪽에는 정동이라는 동네가 있다.

정릉이 있었던 동네이다.

그렇다면 정릉은 무슨 무덤일까?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이었던 신덕왕후의 무덤이 정릉이다.

물론 지금은 성북구 정릉동에 그 무덤이 있다.

무덤을 옮긴 것이다.

왜 옮겼을까?

무슨 사연이 있다.

이처럼 동네 이름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다양한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다.

고대사회로 갈수록 사람의 이름이나 땅의 이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한 이야깃거리를 담았다.

그런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구약성경, 특히 창세기를 읽을 때는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땅의 이름을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등장인물의 이름은 그의 생애를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성경의 첫 인물인 ‘아담’은 ‘흙’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와’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하와를 통해서 아기들이 태어났으니까 최초의 어머니인 하와는 생명의 상징이 맞다.

‘아브라함’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을 지닌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을 민족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세’는 ‘건져낸 사람’이란 뜻이다.

모세가 아깃적에 나일강가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지만 후에 이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압제에서 건져내고 홍해 물을 건너 출애굽을 시키는 인물이 된다.

과연 모세는 건져내는 사람이다.

사람 이름뿐만 아니라 땅의 이름도 독특한 사연을 담고 있다.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땅은 에덴동산이다.

여기서 ‘에덴’은 ‘기쁨’이란 뜻이다.

신혼부부 둘만 있는 그곳은 세상 어디든 기쁨의 동산, 에덴동산일 것이다.




그렇다면 에덴동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먹을 것은 무진장 많고, 할 일은 없고, 모든 환경이 평안한 여름 휴양지 같은 곳이었을까?

성경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놀고먹은 것이 아니다.

창세기 2장 15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담은 에덴동산을 경작했고 에덴동산을 지켜야 했다.

즉, 잘 가꾸어야 했다.

창세기 2장 19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고 하였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한 일 중의 하나는 모든 생물들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름짓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지어본 사람이라면 다 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많은 일을 하며 지냈다.




에덴동산은 기쁨의 동산인데 그 기쁨의 동산에서 아담에게는 할 일이 꽤 많았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진리가 있다.

기쁨은 일과 함께 온다는 것이다.

일하는 자의 기쁨이 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그런 기쁨을 누리며 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일이 지긋지긋하다면 이제 좀 쉬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석달만 쉬어보라고 하면 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과거 한때, 우리도 그랬고 그리스 철학자들 시대에도 그랬는데 일하는 것은 아랫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양반들이나 지체 높은 사람들은 일을 무시했다.

고상한 취미와 학문, 철학 같은 것에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게 축복이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일거리를 주셨다.

왜 주셨을까?

일이 축복이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는 특이한 일들이 많았다.

아담과 하와는 창조된 순간부터 완벽한 인간이었다.

가장 최고의 신체 조건을 지녔을 것이다.

아마 오늘날로 보면 이십 대의 청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는 각 생명체를 최고의 상태로 창조하셨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이 있는데 성경의 기조대로라면 하나님은 달걀을 창조하신 게 아니라 완벽체인 닭을 창조하셨다고 볼 수 있다.

또 특이한 점으로서 뱀이 하와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요즘 반려동물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졌는데 자세히 보면 일방적인 대화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동물들과 자연스럽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동물애호가들의 입장에서는 에덴동산이야말로 천국 중의 천국일 것이다.

그리고 에덴동산은 옷을 입지 않고도 살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주거환경이 갖추어진 곳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완벽한 환경에서는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아무리 좋은 환경일지라도 그 환경을 맘대로 주물럭거려서는 안 된다.

맘대로 하는 순간 환경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법을 주셨다.

법은 지켜야 한다.

법을 지켜야만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법은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나무 두 그루에 대한 것이었다.

한 그루는 생명나무이고 한 그루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생명나무의 열매는 먹으라고 하셨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법은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 두 가지로 구분되어 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생명이 연장된다.

반면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괴롭다.

선악을 알게 되는 순간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많이 안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되기도 한다.




에덴동산은 어디에 있었을까?

영국의 토마스 모어는 1516년에 <유토피아>라는 소설을 썼다.

어딘가에 있을 에덴동산을 그리며 쓴 책이다.

반면에 영국 시인 존 밀턴은 1667년에 <실낙원>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인류가 에덴동산을 잃어버린 이야기를 다루었다.

에덴동산이라고 해서 특별한 곳은 아니다.

그곳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고 지켜야 할 법과 질서가 있다.

서로 사랑하고 법과 질서를 잘 지킨다면 그곳이 바로 기쁨이 넘치는 공간, 에덴동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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