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과는 에덴동산에서의 법이었다

성경이야기 3

by 박은석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세 가지 요소를 들라면 의식주(衣食住)를 꼽는다.

인류 문명은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짐승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따뜻한 털이 몸을 보호하는데 인간은 몸에 난 털은 몸을 보호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결국 다른 어떤 것으로 몸을 감싸서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게 옷이다.

옷이 있어야 인간은 자연의 도전에 응전할 수 있다.

옷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먹거리이다.

인간은 먹거리에 있어서 굉장히 까탈스럽다.

아무것이나 대충 먹을 수 없다.

하루 세끼 시간을 정해서 먹을 정도로 먹거리에 신경을 많이 쓴다.

옷과 음식을 장만했더라도 인간은 살아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어디서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인간은 아무 데서나 살 수 없다.

힘들 때 의지할 벽이 필요하고 위험에서 보호받을 방어벽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집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기드 모파상은 <여자의 일생>이라는 책을 썼다.

한 여성이 일생을 살아가려면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의지하고, 자라서는 남편을 의지하며, 늙어서는 아들을 의지해야 한다는 느낌이 드는 책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우리 여성들의 모습을 서양식으로 재해석한 것 같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을 의지해야 할까?

그것은 인간은 자기 혼자서 삶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맨 처음 사람인 아담과 하와는 다른 누구를 의지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었다.

창세기 2장 25절에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옷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었다.

에덴동산에서는 모든 과일과 곡식을 먹을 수 있었다.

먹거리의 문제도 해결된 공간이었다.

에덴동산에서는 아무 데서나 잠을 자도 되었다.

에덴동산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집이었다.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되면 인간은 자기 맘대로 막살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우리 자신의 삶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가난한 시절에는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다가 여유가 생기고 부유하게 되면 예전의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어서 그런지 엉뚱한 행동들을 한다.

그 결과 다른 사람들과 부딪히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있는 사람이 더한다느니, 시간이 많고 돈이 많으면 죄도 더 많이 짓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맘대로 살려는 본능이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기에 그 본능이 표출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 여의치 않은 상황이 인간에게 제동장치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언제든지 그 상황이라는 제동장치는 풀릴 수 있다.

그래서 외부에서 인간을 제어해 줄 장치가 필요하다.

그 제동장치를 우리는 ‘법’이라는 말로 적당히 표현한다.




법이 있어야 나의 충동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는 일이 줄어든다.

이 사람도 자기 맘대로 자유롭게 살고, 저 사람도 자기 맘대로 자유롭게 살다 보면 언젠가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인데 내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다.

또 그 사람의 자유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럴 때는 나와 너 쌍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을 만든다.

그 법은 나와 너를 구속하기 위한 게 아니다.

나의 자유를 보호하며 동시에 너의 자유도 보호하는 것이다.

너는 나의 영역을 지켜주며 나는 너의 영역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도 아담에게 하나의 법을 주셨다.

그러니까 그 법은 하나님과 아담의 약속이었다.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데 그중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먹으면 죽는다는 약속이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줄여서 ‘선악과’라고 하는데 흔히 이 열매를 사과로 표현한다.

아담이 그 사과를 먹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순간 사과가 목에 걸려서 남자의 목에는 ‘아담의 사과(Adam’s Apple)’라는 조그만 혹이 있다고 하는 우스갯소리도 만들어졌다.

그러면서 인류 역사 속에서 몇 개의 사과 이야기를 한다.

아담의 사과,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의 사과, 그리고 오늘날 스마트 문명을 이끌어가고 있는 스티브 잡스의 한 입 베어 먹은 사과(Apple)이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아담과 하와가 먹은 것은 사과가 아니다.

그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가 없다.

성경은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는 이야기만 들려준다.

먹으면 안 되는 열매이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영역을 표시하는 상징이었다.

그것을 먹는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행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면 싸움이 난다.

전쟁이 난다.

침범한 대가는 혹독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 영역 이외의 것을 바라본다.

저것을 가지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유혹을 물리치기 힘들다.

그 욕심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인류 역사상 등장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욕심을 제어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약성경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도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했다.

야보고서 1장 15절에서는 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는다고 했다.

하와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배가 고팠기 때문이 아니다.

욕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것마저도 먹고 싶어 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욕심 때문이다.

그 욕심이 그 열매를 먹게 만들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아담과 하와는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그들은 전혀 몰랐다.

이전까지 겪어보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창세기 3장 7절은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었다고 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하셨지만 아담은 죽는 게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다.

에덴동산에서는 죽음이란 게 없었다.

에덴동산의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말고 또 하나의 나무가 있었지 않은가?

생명나무이다.

에덴동산에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진시황제가 그토록 찾았던 불로초가 생명나무 아니었을까?

현대의학이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만병통치약이 생명나무 아닐까?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줄 생명나무가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동산 중앙을 벗어나 나무 사이에 숨어버렸다.

생명나무로부터 떠났다.

갑자기 두려움과 수치심이 몰려왔다.

하나님이 말씀한 ‘죽음’이란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거창한 말로 죽음의 정의를 내릴 필요는 없다.

죽음은 당황스럽고 두려운 것이다.

죽음학의 대가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 사람들이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5가지로 나누었다.

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이다.

누구나 죽음을 앞두면 일단 당황스러움을 느낀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아닐 거야!’와 같은 마음이 인다.

자신의 죽음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죽음의 시간이다.

죽음이 아담과 하와를 이끌어갔다.

무화과나무잎으로 자신들의 몸을 가렸다.

숨었다.

누가 그러라고 가르친 것도 아닌데 그랬다.

아담과 하와는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분명히 생명나무가 서 있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먹은 순간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순간 그전에 누려왔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들 스스로 에덴동산에서 숨어버렸다.

에덴동산이 자유로운 곳이 아니라 두려운 곳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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