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죽음을 보았다

성경이야기 4

by 박은석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와 아담은 나무 사이에 숨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서 숨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것 같다.

하지만 금방 들키고 말았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편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잘못을 했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이 잘못을 죄라고 한다.

특별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원죄(原罪)’라고 한다.

그 옛날 고릿적의 아담과 하와의 죄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매우 상관이 깊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 나라에서 쫓겨나서 죄악의 나라에 가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아담과 하와에게서 태어나는 모든 자녀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 죄악의 나라 백성이 된다.

죄악의 나라에서 아무리 착하게 살더라도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신분증을 얻을 수 없다.

이게 원죄의 개념이다.




그건 그렇고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약속이 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이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은 슬프고 괴롭고 환영할 수 없는 것인데 그런 것이 에덴동산에 있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제 죽음의 순간이 도래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것을 죽음의 감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끄럽고 두려운 감정, 숨고 싶은 감정, 하나님을 불편하게 여기는 감정들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것들을 통틀어서 아담에게 찾아온 죽음이란 결국 하나님과의 단절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육체적으로 숨이 끊어지는 죽음도 있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죽음은 영적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영적인 죽음을 크게 여긴다고 하더라도 육체적인 죽음을 작게 여길 수는 없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즉시 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그들을 피해 간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죽음이라는 벌을 면제하신 것도 아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분명히 죽음을 경험하였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면 창세기 3장 21절에 나오는 한 단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서 ‘가죽옷’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가죽이 무엇인가?

짐승의 살이다.

가죽을 얻으려면 짐승을 죽여야 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려고 하나님은 짐승을 죽이셨다.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목격한 최초의 ‘죽음’일 것이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가죽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나자 가릴 것, 가죽옷이 필요해졌다.

누군가 죽어야 했다.

죄를 지으면 죽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자는 아담과 하와인데 그 여파로 괜히 엉뚱한 짐승이 죽게 되었다.

그 짐승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억울한 일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에덴동산의 생태계가 파괴되었다.

이처럼 죄는 나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함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사람이 오는 것은 엄청난 일이라고 했다.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오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한 명 오는 것은 세상이 움직이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한 번 잘못하는 것은 세상에 큰 흠집을 내는 일이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그 짐승과 함께 노닐면서 그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던 아담이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는 자신의 부끄러운 것을 가리려고 짐승을 잡아 죽여야 했다.

죄는 이렇게 우리의 관계를 다 무너뜨려 버린다.

죄는 우리의 모든 것을 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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