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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석 Mar 27. 2024

아이가 나를 키웠다!


“일어나! 늦었어! 학교 가야지!”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아침마다 울리는 소리이다.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5분이라도 더 자고 싶고 부모들은 5분이라도 더 빨리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싶다.

아이는 집에 있는 게 편안하고 부모는 아이가 집에서 나가는 게 편안하다.

졸린 눈 비비며 세수를 하고 꾸벅꾸벅 졸면서 숟가락을 입에 가져간다.

밥 한 사발 먹는 동안 졸음이 물러간다.

아이가 가방을 메고 현관문을 나서면 그제서야 엄마는 한숨을 쉰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낮아지기를 반복했다.

아이에게 화를 냈다가 어르기를 반복했다.

아이는 아이대로 성난 호랑이처럼 으르렁댔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돼지처럼 될 대로 되라는 듯이 투덜거리다가 순둥이 곰처럼 빙긋이 웃으며 집을 나선다.

이렇게 몇 차례의 전쟁과 평화가 오고 간다.

전쟁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이 있는 집에서는 아침마다 일어난다.




세상에서 제일 미운 사람이 있다면 아침에 내 말을 안 듣는 아들이요 딸일 것이다.

그러다가도 세상에서 제일 이쁜 사람이 있다면 아침에 가방 메고 집을 나서는 아들이요 딸일 것이다.

같은 사람인데 그 사람을 보는 내 마음이 미웠다가도 좋아지고, 좋아졌다가도 미워진다.

집안에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을 때 '나도 저랬나?' 생각한다.

도무지 나는 저러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아침에 척척 잘 일어났고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고 부모님 속을 썩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를 닮은 것일까? 집집마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가 보다.

친구의 소셜을 들여다보았는데 이런 아침을 보냈는지 ‘육아’라는 단어만 큼지막하게 써 놓았다.

‘육아(育兒) : 아이를 기름.’ 다 아는 말이다.

그런데 그 말 아래 또 다른 육아가 쓰여 있었다.

‘육아(育我) : 나를 기름.’ 

아! 그걸 몰랐구나!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곧 나를 키우는 것이었다!




아이 앞에서는 항상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른이니까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다.

내가 맞다고 하면 맞는 것이고 내가 틀렸다고 하면 틀린 것이라고 아이에게 가르쳤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은연중에 그렇게 아이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아이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등교시간에 늦으면 큰일 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또래들보다 뒤처지면 졸업해서도 사회에서 뒤처진다고 생각했다.

내 아이는 학교에서 적응도 잘하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아야 하며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회에서도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을까? 절대 아니다.

부족한 게 많지만, 결함이 많지만 그런대로 한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부족함을 채우고 결함을 메꾸면서 나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다.

<삐뽀삐뽀119> 같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은 아니다.

부족한 게 많았으니까, 모르는 게 많았으니까 배워야 했다.

아이가 울어댈 때 당황해서 이렇게도 안았다가 저렇게도 안으면서 아이 안는 방법을 배웠다.

아이가 배고프다고 칭얼대니까 이것도 먹이고 저것도 먹이면서 아이 먹이는 법을 배웠다.

아이를 어르기 위해서 화도 냈다가 재롱도 부렸다가 하면서 사람 달래는 법을 배웠다.

아이가 아플 때 그 아이를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의 한계를 알게 되었다.

아이를 살려달라며 부르짖으면서 신을 알게 되었고 신앙을 배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생 배우라고 아이를 주신 것 같다.

아이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 때문에 인생을 알게 되었다.

아이 때문에 나의 도량이 넓어졌다.

아이 때문에 내가 어른이 되었다.

아이가 나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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