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올림픽 경기가 끝난 후에 패럴림픽 경기가 진행되길래 패럴림픽이 뭔지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물론 마음만 먹었을 뿐이고 금방 잊어버렸다.
그런데 데이비드 브룩스의 <사람을 안다는 것>이란 책을 읽다가 패럴림픽을 만든 루트비히 구트만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이런 훌륭하고 위대한 인물을 여태껏 내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곧바로 인터넷망을 이용해서 구트만에 대한 정보를 섭렵하였다.
그리고 패럴림픽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나보다 먼저 정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지식을 인터넷에 공유한 덕분에 나도 새로운 지식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식을 나의 말로 정리해서 브런치에 올리고자 한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이 지식을 얻게 될 테고 그 사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지식을 공유할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 좋은 지식을 누구나 다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루트비히 구트만(Ludwig Guttmann, 1899년~1980년)은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신경과의사였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39년에 독일을 탈출하여 영국에 거주하게 되었다.
영국에서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갔다.
그러자 1943년 9월에 영국 정부는 구트만에게 버킹행에 있는 스토크 맨데빌 병원에 국립 척추 부상 센터를 설립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과 연합군 간의 공중전이 치열하였다.
물론 독일 전투기의 폭격을 받아서 추락한 연합군의 전투기들도 많았다.
이때 다행히 조종사는 탈출에 성공하더라도 심각한 부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땅에 떨어지다 보니 척추 골절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영국 정부에서는 척추 손상을 입은 조종사들의 치료와 재활을 위해서 국립 척추 부상 센터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이 센터는 1944년 2월에 문을 열었고 구트만이 이사로 임명되었다.
척추 손상을 당한 환자들이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일찌감치 환자들에게 강력한 진정제를 주사해서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 구트만은 그런 처방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의사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환자를 바라보았다.
환자를 침대에 눕혀 놓는 대신 침대 밖으로 나오게 만들었다.
진정제를 주사하는 대신에 환자가 통증을 잊어버리고 다른 것에 몰두하게 하였다.
구트만이 택한 방법은 환자들에게 공놀이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동료 의사들은 구트만의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심지어 구트만의 행위를 심사하기 위한 조사위원회가 소집되기도 했다.
그때 한 의사가 구트만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은 그저 죽어가는 장애인들인데 당신은 저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러자 구트만은 대답했다.
“저 사람들이요? 저들은 영국 최고의 남자들이죠.”
구트만은 병원의 하반신 마비 환자들을 대상으로 장애인 단체를 꾸렸고 장애인 운동경기를 열었다.
그 경기는 엄청난 호응을 얻었고 하반신 장애인들에게 삶의 희망을 안겨 주는 경기가 되었다.
급기야 전국적인 하반신 마비 환자 경기로 발전하였다.
세계 각국에서도 이 소문을 들어서 하반신 장애인 경기는 점점 더 규모가 커져갔다.
급기야 1960년에 패럴림픽이라는 장애인 올림픽 경기가 탄생하게 되었다.
패럴림픽(Paralympics)은 하반신 마비를 의미하는 ‘패러플리지어(paraplegia)’와 ‘올림픽(Olympic)’의 합성어이다.
하지만 다양한 장애인들이 참여하면서 패럴림픽은 ‘동등하다(패럴렐, parallel)’는 의미를 담게 되었다.
패럴림픽 홈페이지에는 패럴림픽이 그리스어 전치사 ‘파라(para, 나란히, 함께)’와 ‘올림픽’의 합성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 사람의 긍정적인 생각이 장애인들의 삶을 바꿨고 세상의 편견을 바꿔 놓았다.